국가보안법 논란이 날로 격화하고 있다. 존속과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도심에서 격렬한 시위로 맞서고, 각계 원로들까지 어느 한 쪽에 가세하여 구호를 외치고 있다.양측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여야는 협상이라는 정치의 기본기를 잊은 채 정쟁에 몰두하고 있다. 양측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협상을 시작하면 얼마든지 거리를 좁혀 나갈 여지가 있다.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는 여당은 폐지에 따른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일부 조항을 형법에 포함시키거나 대체입법을 고려하고 있다. 야당도 국보법의 문제 조항을 개정하자는 입장이다.
여야는 협상 테이블에 앉아 어떤 조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구체적인 각론을 놓고 토론을 하든 싸움을 하든 해야 한다. 지금처럼 폐지냐 존속이냐 총론을 놓고 기 싸움을 하는 것은 옳은 대결이 아니다. 여야는 국론 분열을 부채질만 하고 있다.
국보법 논란을 풀기 위해서는 열린우리당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여당은 민주적인 역량을 동원해서 이 사태를 풀어야 한다. 대상이 국보법이기 때문에 더욱 더 민주적인 절차와 정신이 중요하다.
열린우리당에는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고, 그 점을 당의 정통성으로 내세우고 있다. 당내에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국보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른 사람들이 많다. 국보법의 피해자들이 국보법 폐지나 개정에 앞장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지 단지 국보법 폐지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가해세력을 응징하기 위해 싸웠던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총칼에 맞서 자신의 생을 던졌던 한 시대의 높은 꿈을 적개심으로 얼룩지게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 5일 노무현 대통령이 MBC TV의 시사토론에 출연해 전격적으로 국보법 폐지를 주장한 것은 적절치 못했지만, 더 큰 문제는 노 대통령의 발언 이후 열린우리당에서 나타났다. 그 때까지 당내에는 국보법을 완전 폐지할 만큼 안보상황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개정을 주장하는 이삼십 명의 의원들이 있었으나 대통령의 한마디로 입을 다물게 됐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국보법 폐지에 반대의견을 밝혔고, 대통령은 폐지를 주장했다. 국가기관들이 이렇게 의견을 밝힌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국보법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제는 국회가 그 모든 의견들을 수렴하여 개폐 논란을 정리할 차례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말은 여당에 '지시'로 전달됐다. 개정론자들에겐 '경고'로 들렸다. "대통령은 중요한 당원이니 그의 의견을 충분히 참고하고, 국민의 뜻을 폭 넓게 수렴하여 당의 입장을 정하겠다"고 말하던 이부영 대표도 국보법 폐지를 당론으로 몰고 있다.
대통령의 한마디가 아직도 그런 위력을 발휘하다니 놀랍다. 박정희 대통령도 전두환 대통령도 아닌 노무현 대통령이 이런 현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큰 일이다. 국민의 70%가 국보법 폐지에 반대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들을 외면한 채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일사불란하게 가는 정당을 민주정당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 당은 국민을 위해서는 물론 대통령을 위해서도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늘 열린우리당의 모습은 공화당이나 민정당과 닮은 점이 있다. 국보법이 비민주적인 악법이라고 매도하면서 폐지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비민주적인 행태는 너무나 아이러니하다.
전직 총리들이 가슴에 띠를 두르고 '보수 원조'를 지원하는 시위를 하는 것보다 더 서글픈 것은 공화당을 닮은 열린우리당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국보법에 대한 주장은 폐지든 개정이든 존속이든 다 귀 기울일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결, 선과 악의 대결로 몰아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면 어떤 악법이 있어도 국민은 안심하고 살 수 있다. 그러나 여당이 '악법'을 폐지하겠다고 소리치는데 국민이 오히려 불안해 한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국보법 폐지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대통령과 여당이 스스로를 민주화하는 것이다.
장명수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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