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계“이제는 ‘병’자만 들어도 가슴이 뜁니다.” 병역비리 파문에 휩쓸려 야구장 만큼 경찰서 가는 일이 잦아진 모 구단 홍보팀장의 하소연이다. 요즘 프로야구 관계자들을 만나면 한결 같이 깊은 한숨이다. 최고 인기를 누리던 프로야구가 출범 22년 만에 존망의 기로에 섰다는 위기의식이 짙게 배어 있다.
한마디로 프로야구는 쑥대밭이다. 선수들의 경찰서행이 꼬리를 물면서 매표소 앞에 길게 늘어서던 팬들도 자취를 감췄다. 신성한 병역의 의무와 함께 팬들의 신뢰마저 저버린 데 대한 따가운 질타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고개를 떨군 선수들에게만 ‘돌을 던질’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자 과제다.
1개 구단이 사라졌다
이번 병역비리 파문은 프로야구 사상 최악의 대참사로 기록될 만하다. 병역비리와 관련해 철장 신세를 진 프로야구 선수는 모두 19명. 여기에 영장 신청 대상자 13명과 불구속 24명까지 합한다면 사실상 팀 1개가 희생된 것이나 다름없다.
병역비리 파문의 후폭풍은 곧바로 스탠드를 휩쓸고 갔다. 병역비리의 복마전인양 프로야구를 흘겨보는 시선 또한 예사롭지 않다. 경기당 평균 4,681명에 이르던 관중수는 파문이 본격화한 4일 이후부터 평균 3,152명으로 30% 이상 뚝 떨어졌다.
병역면제의 계산서
1999년 프로에 나란히 뛰어든 이진영(24ㆍSK)과 권오준(24ㆍ삼성)은 각자의 길을 걸었다. 선린정보고를 졸업, 입단하자마자 해병대에 지원한 권오준과 군산상고 출신으로 프로무대에서 계속 뛰고 있는 이진영. 그 선택의 결과 두 선수는 너무 다른 처지에 놓였다. 프로 2년차 권오준은 올 시즌 9승5패의 호성적에도 불구하고 고작 2,400만원의 연봉을 받고 있는 것과는 달리 병역비리와 관련해 불구속 입건된 이진영은 6년간 갈고 닦은 고감도 타격을 발판으로 1억6,000만원 고액연봉자가 돼 있다.
인생의 최대 황금기인 20대 초ㆍ중반 프로선수들이라면 누구나 이 같은 계산서의 은밀한 유혹에 직면하게 된다. 3~4년 정도만 잘 뛰면 억대 연봉이 보장되고 9시즌이 지나면 자유계약선수(FA) 대박도 꿈꿀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군복무는 사실상 ‘무덤’이다. 2년이 넘는 공백에 제대 후에 옛 기량을 찾는다는 보장도 없다.
계속 야구하게 해주세요
프로야구 선수들이 ‘무덤’을 피하는 합법적인 방법은 2가지. 아시아경기 금메달과 올림픽에서 입상하는 것, 그리고 국군체육부대의 야구팀(상무)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좁은 문이다. 1982년 선동열(삼성코치)과 최동원 등에게 혜택을 줬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당시 우승)는 아예 면제대상에서 제외됐고 예선 탈락한 이번 아테네올림픽에서 보여지듯 올림픽 입상은 훨씬 더 어려워졌다.
상무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다. 상무의 엔트리는 35명으로 1년 수용 인원은 10명 선에 불과하다. 이종범(기아) 송진우(한화)가 그랬던 것처럼 방위병으로 근무하면서 홈경기에 출전하는 제도도 사라진 지 오래다.
해답은 한가지다
선수들이 ‘국방의 의무’를 다하면서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늘려주는 일이다. 지난해 프로 1ㆍ2군 리그에 편입돼 있는 상무와 경찰청에서 각각 22명과 14명의 선수를 받아들인 프로축구가 이번 병풍을 비켜간 점을 주목할 만하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경찰팀 창단을 희망하고 있다. FA 기간에 군복무 기간을 포함시키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구경백 경인방송 해설위원은 “프로야구가 국민스포츠로 거듭나려면 뼈깎는 자성과 함께 선수들이 야구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수 있도록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병주 기자 bjkim@hk.co.kr
■ 연예계
병역비리 파문으로 연예계도 발칵 뒤집혔다. 현재 경찰 수사선상에 오른 연예인은 4명. 이들은 브로커 명단에 이름만 올라있을 뿐, 아직 혐의사실이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 중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은 신모(25)씨가 ‘도피성 출국’을 해 사실상 혐의를 시인한데다, 한 고리만 풀리면 연루자가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 달려 나오는 병역비리 사건의 특성상 파문이 어디까지 확대될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문제가 된 연예인 4명 중 3명이 소속된 S기획사의 대표와 매니저까지 ‘리스트’에 오른 것으로 밝혀져, 기획사가 조직으로 개입한 대규모 연예계 병역비리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문제 연예인 3명을 각각 기용한 대작 드라마 2편을 제작중인 K프로덕션과 이들 드라마를 방송할 예정인 KBS, MBC도 초비상이다. 일단 연루자가 나오는 장면을 뒤로 미루고, 나머지 촬영을 진행하며 수사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K프로덕션 관계자는 “아직 수사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구설에 오른 만큼 연기자 교체가 불가피할 것 같다”면서 “방송 도중 이런 일이 터졌으면 더 황당할 뻔했는데 촬영 초반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대형 병역비리사건이 터질 때마다 연예인은 단골로 등장해왔다.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인기’를 먹고 사는 직업의 속성상 군복무로 인한 1~2년의 공백은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 더구나 요즘은 연예계 데뷔 시기와 스타군의 연령이 점점 낮아지면서 한창 떴을 때 군입대 문제에 부딪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가수 김 모씨 등 실제로 반짝 인기를 얻었다가 군복무 후 잊혀진 연예인들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연예계에는 20대 중반을 넘기고도 군 미필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학교에 적을 두고 휴ㆍ복학을 반복하거나 드라마 출연을 이유로 방송사의 ‘힘’을 빌리는 등 각종 연줄을 동원해 입대를 미루는 것이다. 연예계 관계자는 “이 과정에서 병역 브로커들이 유혹의 손길을 뻗치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을 하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병역기피를 위해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는 의혹을 받아 국내활동을 원천봉쇄 당한 가수 유승준의 예에서 보듯, 연예인의 병역기피의혹을 바라보는 시선은 갈수록 따가워지고 있다. 요즘 네티즌들은 ‘습관성 탈골’ ‘성격장애’ ‘정신질환’ 등 석연치 않은 이유로 병역면제를 받았거나, 입대를 차일피일 미뤄온 연예인들의 명단을 인터넷에까지 올리며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희정 기자 jaylee@hk.co.kr
■수사 뒷얘기
“처음 수사를 할 때는 프로야구 2군 선수 위주로 10명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로야구계는 물론 연예계까지 강타하고 있는 초대형 병역비리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경찰의 설명이다. 프로야구, 아마야구를 비롯해 연예계까지 파장이 확대되자 담당 수사진들도 크게 놀랐다는 얘기다.
경찰이 수사에 본격 착수한 것은 지난달 21일. 병역을 면제 받게 해주겠다며 접근하는 브로커들이 있다는 제보가 경찰에 입수됐다. 그러나 브로커 김모(29ㆍ구속)씨가 접근한 ‘고객’은 다름 아닌 경찰의 인척 박모씨였고 이 ‘고객 아닌 고객’이 경찰에 사실을 알리면서 거대한 병역비리의 꼬리가 잡혔다.
경찰은 8월25일 박씨를 만나기 위해 나온 김씨를 현장에서 검거, 프로야구선수 10여명이 연루됐다는 단서를 포착했다. 그러나 김씨가 갖고 있던 고객 명단을 확보하면서 이는 빙산의 일각이었음이 드러났다. 이어 김씨의 브로커 스승인 우모(38ㆍ구속)씨가 추가로 검거되자 병역비리에 연루된 선수들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에 따라 병역비리 규모는 10여명에서 프로야구선수 50명을 포함한 80명선으로 늘었다가 결국 167명까지 불어났다.이 중 병역비리와 관련해 브로커와 금품을 주고 받은 경우가 130명에 달했다. 경찰 관계자는 “이렇게 굴비 엮듯 줄줄이 드러날 줄은 몰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경찰에 구속된 브로커 우모(38)씨와 김모(29)씨는 최초에는 거래관계였으나 이후 동지로, 그리고 나중에는 경쟁자로 입장이 바뀌어 갔다. 1998년 우씨의 코치(?)로 병역이 면제된 김씨는 이때부터 우씨의 사업에 동참, 동료 야구선수 등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선수들을 소개시켜주고 건당 ‘수고비’를 받았다.우씨는 소변에 혼합하는 약물의 성분이나 구입처 등은 알려주지 않은 채김 씨를 ‘영업사원’으로만 활용했으나 2001년 김씨가 약물의 성분을 알아내고는 우씨에게 결별과 함께 독립을 선언했다.
김씨는 이후 야구코치와 선수들끼리 서로 소개 시켜주도록 하는 피라미드방식을 통해 ‘먹이’를 확보했고 모두 11억1,000여만원의 브로커비를 받아 챙겼다. 그러나 김씨는 지난달 말 경찰에 검거됐고 우씨도 곧이어 쇠고랑을 차야 했다.
경찰 관계자는 “브로커들이 8년 동안이나 병역면제 장사를 하면서 점점 더 대담하고 집요한 수법을 동원해 일부 고객의 경우 부모에게 접근해 설득하는 우회전법을 택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진성훈 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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