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5일 MBC TV 토론에 나와 거친 말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할 때 나는 절망을 느꼈다. 나는 일단 국보법을 개정한 후 시대상황을 보면서 폐지를 검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요 내용을 형법에 포함시키고 국보법을 없애자는 논의에도 귀 기울이고 있다.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듣기에도 노 대통령의 국보법 폐지론은 반감을 불렀다. 그것은 법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였다. 일국의 대통령이 국가대사에 관해 매번 저렇게 말해야 하는가라는 절망과 분노가 치솟았다.
그 동안 역대 정권이 국보법을 악용한 전례가 많더라도 그것은 정권의 죄지 법의 죄가 아니다. 또 대다수 국민은 국보법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 주는 보루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6·25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돼 온 북의 위협 아래 국민이 그런 의식을 가졌던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국민을 안심시키면서 "이젠 국보법을 폐지할 때가 되었으니 그렇게 해보자"고 호소했어야 한다. 형법에 이런 부분을 포함시키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조목조목 설명했어야 한다. "낡은 유물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고 말할 일이 아니다.
또 불과 며칠 전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국보법 폐지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았는데 대통령이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 것은 오만불손하다는 인상을 준다. 내 생각엔 폐지가 바람직하다고 밝히더라도 다른 국가기관의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대통령의 국보법 폐지론은 이처럼 거친 태도 때문에 더욱 거센 반발을 불렀다. 대다수 국민은 대통령의 그런 스타일에 이미 체념하고 있는 상태지만, 국보법과 같이 예민한 문제를 그런 스타일로 매도하자 참았던 불만이 다시 치솟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지난 9일 이른바 국가 원로들이 "대한민국을 위기로부터 구출하자"는 시국선언문을 내놓았다. TV 화면에 비치는 원로들의 면면을 바라보면서, 시국선언문을 읽으면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품었던 실망 못지않은 실망을 느낀다.
전직 총리, 국회의장, 장관, 국회의원, 군 장성 등 1500여 명이 서명한 이 시국선언은 건국 후 최대 규모의 선언이라고 하는데, 구구절절 대다수 국민의 불안과 불만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읽는 원로다운 혜안은 찾아볼 수 없다. <정치 경제 안보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이념이 도전받고, 친북 좌경 반미 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있다. 대통령은 좌우대립의 이념갈등을 재현시켜 뿌리를 부관참시하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다…> 고 선언문은 개탄하고 있다. 정치>
선언문은 또 대통령에게 수도 이전, 국보법 폐지, 과거사 청산, 언론개혁 등을 중단하고 경제와 안보 등 현안 해결에 국력을 집중하라고 촉구하고 국보법 폐지를 막기위해 국민 총궐기를 호소하고 있다.
선언문은 많은 부분 국민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원로들의 선언이라기엔 과장되고 선동적인 부분이 눈에 거슬린다. 국보법만 해도 폐지를 막기 위한 국민 총궐기를 호소할 뿐 남북관계의 변화를 담아 국보법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없다.
국보법 남용과 악용이 극심하던 시절 그 원로들이 단 한 번이라도 인권침해를 우려하는 시국선언을 시도한 적이 있는지, 그 당시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 국보법에 대해 어떤 인식을 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어진다. 독재정권 아래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자기성찰은 있어야 한다.
보수세력은 자기성찰을 못하고 터무니없는 자만심으로 변화를 거부했기 때문에 대선과 총선에서 잇달아 패배했다. 이번에 나온 시국선언이 이 나라 보수의 현실 인식을 대변하고 있다면, 그들은 권력을 되찾겠다는 꿈을 꾸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새 집권세력은 거칠고 급진적이고 국민 설득이나 정책 추진에 서투르다. 그래서 그들에게 적절한 조언을 하고, 국민의 불안을 달래 줄 원로다운 원로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그런데 보수원로들만 있고 국가원로는 드물다. 해방 직후와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보수 논리로 이 급변하는 시대를 어떻게 살아내겠는가. 변할 능력이 없는 보수야말로 급진세력을 키우는 온상이다.
장명수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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