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일대에서 딸라 장사하다 증권사까지 차린 어머니를 따라 초등학생 때부터 명동에서 살았어요. 어머니에게 용돈 깨나 얻어 쓰던 ‘주먹’ 형들 덕에 극장구경은 늘 공짜였죠. 내로라 하는 문인들도 많이 만났는데, 공초 오상순 선생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1950~60년대 명동을 무대로 활동한 예술인들의 이야기를 그릴 EBS 24부작드라마 ‘명동백작’(토ㆍ일 밤 11시)의 작가 정하연(60)씨가 털어놓는 ‘명동키드의 추억’이다. 정씨는 ‘명성왕후’ ‘왕과 비’ 등 굵직한 작품들을 써온 인기 작가. 11일 첫 방송을 앞두고 만난 그는 “내가 아니면 누가 이걸 쓰겠느냐”며 “오랜만에 작품 쓰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고했다.
“50년대는 전쟁으로 상처 받고 가난했지만 개인의 개성과 자유, 그리고 인간미가 넘쳤던 시대죠. 예술인들뿐 아니라, 그 시절 서민들의 삶을 돌아봄으로써 5ㆍ16 이후 먹고 살기란 국가적 명제에 쓸려 잃어버린 한국인의 원형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명동백작’은 20년 가까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명동을 드나들었다는 기자 겸 소설가 이봉구의 별명. 드라마는 그를 중심으로 동방싸롱, 청동다방, 돌체, 은성 등 명동일대 다방과 술집에 모여 앉아 시대를 통탄하고 예술을 논했던 당대 예술인들의 삶을 풀어나간다.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한 이봉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에 대해 작가는 “이 작품은 성공한 예술인들보다는 시대에 부대끼면서 치열하게 자기 것을 찾아간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이며, 더럽고 깨끗하고 옳고 그른 50년대의 모든 것을 품어 안았던 그야말로 그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봉구와 함께 요절한 시인 박인환과 전혜린, 시대와 끊임없이 불화한 김수영 등의 삶을 주로 다루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다큐드라마인 ‘명동백작’에는 시대배경을 설명하거나, 이야기를 이어주는 해설자(정보석)가 등장하고 전문가들의 인터뷰도 곁들여진다. 작가는 “생각하면서 보는 드라마로 만들다 보니 다소 무겁고 어둡고 어려울 수도있다”면서 “전문서적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듯이, 상업적 잔재미와는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드라마에는 이봉구 역을 맡은 뮤지컬 배우 박철호를 비롯, 이진우(김수영) 김성령(김수영의 부인) 차광수(박인환) 강태기(이중섭) 이재은(전혜린)등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여느 드라마에 비해 물질적 보상도 적고 높은 시청률을 기대하기도 어렵지만, 모두들 “좋은 작품을 만나 행복하다”고 입을 모은다.
작가는 이 작품을 “아버지 세대에 대한 빚갚기”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으니, 후대에 대신 빚을 갚는 심정으로 썼습니다. 단 몇 %가 되더라도 젊은이들이 이 작품을 통해 불과 몇 십년 전이지만 잊혀지고 만 그 시절, 우리 삶의 뿌리를 돌아보았으면 해요.”
EBS가 ‘문화사 시리즈’란 이름으로 이어갈 후속편의 집필도 맡을 예정인 그는 인터뷰 말미에 요즘 드라마에 대한 ‘쓴 소리’를 덧붙였다. “다 알지만 모른 척 하고 넘어가야 할 얘기를 다 끄집어내 밑바닥까지 까발리는 작품이 너무 많아요. 젊은 작가들이 좀더 책임감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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