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사내아이들아버지가 어느날 청소년상담소를 찾았다. 중학생 아들이 가출을 일삼으며 자꾸 엇나가니 바르게 잡아달라는 하소연이었다. 학교 성적이 나쁘고 친구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해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것 같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며칠 뒤 전화를 받고 다시 상담소를 찾은 아버지는 “아들보다 아버지가 문제”라는 충격적인 소리를 들었다. 상담원이 전한 아들의 가출 이유는 이랬다.
아버지는 늘 바쁘다며 술 마시고 밤늦게 들어와서는 어머니에게 폭언과 잔소리를 해댄다. 그런 아버지를 존경할 수 없고 경멸한다. 아버지로 인해 억눌린 집안분위기에 숨이 막힌다. 공부를 하고싶어도 할 수가 없다. 집에있기 싫다.
아들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자아이들이 드세진 반면 남자아이들은 연약해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부럽다’며 딸이 당당한 사회인으로 자라도록 열성을 다하는 부모들이 많아진 것을 감안하면 예전에 비해 여자아이들의 목소리가 커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들의 위기’ 시대를 설명하는 전부인가.
전문가들은 말한다. 아들의 위기는 아버지의 위기에서 비롯된다고.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은 자라서 역시 강압적인 아버지가 된다고.호주제 폐지에 손을 들고 가부장적 권위를 부정하는 시대, 전통 가족의 응집력이 사라지고 기능위주 핵가족으로 대체되는 시대에 여전히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대물림된 가부장적 권위와 기득권을 놓지않으려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올바른 성적 역할모델을 줄 수 없다고.
좋은 아버지가 되기란 그래서 뼈를 깎는 자기성찰의 기록일 수 있다. 곰곰생각해보라. 아들에게 자전거 타기, 수영하기를 가르쳐준 적이 있는가. 아들의 첫 몽정이 언제였는지 기억하는가. 아이의 몸이 변화하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아들이 살아가야할 시대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해본 적이 있는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한다. 오늘 아들은 아버지의 아버지다.
/글 이성희기자summer@hk.co.kr
/사진 류효진기자jsknight@hk.co.kr
■아버지와 나, 나와 아들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이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언제 교직에 입문했으며 아버지가 길러낸 제자가 몇 명인지는 알지 못한다. 아버지가 무려 43년간 교직에 계셨다는 것도 얼마전 우연한 기회에 이력서를 보고야 알았다.43년 동안의 헌신에 대한 보답으로 교직에서 퇴직할 때 훈장을 받았다는 것은 기억나지만 솔직히 그 훈장의 이름이나 그게 어떤 가치를 지닌 것인지도 내겐 관심밖이다.
내게 가장 소중한 아버지의 기억은 펄떡펄떡 뛰던 거친 심장소리와 까실까실한 턱수염이다. 시골학교 교사 시절, 당시만 해도 귀했던 자전거를 처음 장만한 아버지는 그걸 맨 처음 나한테 자랑하고 싶으셨나 보다. 교정에서 나를 태우곤 신이 나서 운동장을 돌던 아버지는 순간적으로 기우뚱하면서 자전거와 함께 쓰러졌다.
그 순간 뒷 좌석에 탔던 내 오른발이 자전거 바퀴에 끼면서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나를 끌어안고는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가슴팍에서 전해지던 터질 듯한 심장소리는 얼마나 절박했는지.
술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거나하게 취하면 내 잠자리 머리맡에 앉아서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 당겨 덮어주고는 까칠한 턱수염으로 볼을 부벼대곤 하셨다. 그 손길과 술 냄새가 섞인 달큰하고 따스한 숨결을 기억하면 지금도 뺨이 간질간질한 것 같다. 아, 그리고 또 하나.대학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는 양복 한 벌을 맞춰주고는 손수 넥타이 메는법을 가르쳐주셨다. 그때 서투른 솜씨로 따라 하는 나를 대견스럽게 보던 그 표정은 또 얼마나 가슴 벅찬가.
이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서 나를 돌이켜 본다. 그리고 기도한다. 아이들이 아빠가 무슨 연구소를 설립했고 해외여행을 얼마나 자주했으며 무슨 학위를 갖고 있고 어떤 책을 썼는지 등을 기억하기보다, 함께 장대비를 맞으며 축구공을 차면서 허허거리던 웃음소리로, 동해의 아침해를 보여주겠다며 강릉도 아닌 서울의 아파트 뒷산 바윗돌을 헤집고 오르며 자신들을 끌어당겨주던 배짱 좋은 손길로 나를 기억해줬으면.
생각해 보면 크고 위대한 족적을 남긴 명사보다는 작고 하찮아 보일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되기 위해 열심을 다했던 사람이 훨씬 아름다운 것 같다. 새삼스레 두 아들이 고맙다. 항상 아버지 노릇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고 긴장하게 만들어주는 존재들이므로. 이래서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인가.
송길원/ 하이패밀리 대표, 건강가정시민연대 공동대표
■좋은 아버지 되기
정유성 교수는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눈높이’가 아닌 ‘존재의 높이’를 맞추라고 말한다. ‘가르치려 들지말고 친구가 되라’는 주장이다.
“지식정보화 사회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아이들이 어른보다 오히려 정보습득이 더 빨라요. 전통사회에서는 아버지가 지식의 전수자였으나 지금은 인격적인 감화가 없으면 아이들이 코웃음치기 십상이지요. 그들의 존재와 인격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중학교 2학년인 외아들로부터 지금도 “아빠가 가장 친한 친구” 소리를 듣는다는 정교수의 좋은 아빠 노하우.
1. ‘귀여운 아빠’가 되라
아들과 부지런히 휴대폰으로 메일과 문자를 주고 받는데 반드시 이모티콘과 그들만의 은어를 사용한다. 반갑다는 표현의 그들식 은어인 ‘방가방가’는 기본, 다양한 이모티콘으로 재치를 뽐낸다.
2. 내게 가장 아까운 것을 주라
항상 시간에 쫒겨살면서도 아이를 위해 매일 40분의 시간을 냈다. 아침에 깨워서 세수를 시키고 아침을 먹이고 유치원에 데려다 주는 일을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하루 40분을 못낼 만큼 바쁜 사람은 사실상 없다.
3. 정기적으로 함께 하라
바삐 살다가 문득 하루 맘잡고 놀아준다는 아빠들은 많다. 그러나 ‘가끔, 한번에 왕창’ 보다 ‘작은 일이라도 정기적으로 예측가능하게’ 함께 하는 것이 아이의 신뢰를 얻는다.
4. 목욕을 함께 하라
일주일에 한번 아니면 한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아들 손에 등을 맡기는 스킨십도 뿌듯하지만 아이 몸의 변화를 체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5. 콘서트 장에 반드시 같이 가보라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지만 아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수 공연도 함께 다닌다. TV속 오빠부대나 누나부대가 한심해보였다면 더욱 가봐야 한다. 현장에서 대중스타에 열광하는 아이들을 직접보고 이야기를 나눠보면 예상못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6. 좋은 아버지는 평등한 남성이기도 하다
아내와 가사와 육아에서 평등한 관계를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 경우 아이에게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고 기저귀를 빠는 등 가사분담을 생활화했다. 지금도 아들과 함께 저녁설거지를 한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아이들은 민감하게 감지하고 이율배반을 느낀다.
/이성희기자
■당신은 어떤 아버지
#과속형
능력 이상을 요구한다. 자녀가 모든 분야에서 뛰어나야한다는 ‘일류병’ 중독자로 아이들에게 그들만의 시간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추월형
아이의 필요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주어버린다. 과잉보호, 과잉 바짓바람 타입. 어린시절 가난하게 살았던 흔적이 있다. 모든 해결책을 미리 제시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실패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키우기 어렵다.
#음주운전형
자신의 처지를 잊고 환상에 사로잡힌 유형. 기분에 따라 자녀를 대하는 기준이 달라진다. 자녀에게 기피대상이 되기 쉽고 갈등이 깊어지면 자식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남길 수 있다.
#뺑소니형
책임회피에 익숙하고 언제나 핑계거리를 찾으며 자녀에게 무관심하다. 아이들은 자신감을 상실한 채 고립감과 우울증에 시달리기 쉽다.
#신호위반형
규칙을 무시하고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목적을 이루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도덕과 윤리적 기준을 잃게 만든다.
#중앙선 침범형
자녀의 삶을 지나치게 간섭하고 통제한다. 아이는 아버지로부터 이해받고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갖기 어렵다. 가출이 잦은 청소년들이 흔히 안고있는 문제.
(아버지학교 제공)
위 항목 어느것에도 포함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일단 ‘좋은 아버지’ 자격이 충분하다. 물론 몇 가지 항목에 해당된다고 해서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좋은 아버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최근엔 각계각층에서 좋은 아버지 모임이 활성화하고 있는 만큼 열성을 갖고 문을 두드려보자.
좋은 아버지 재단(02-335-0142)이 운영하고있는 아버지학교는 아버지와 나, 아버지 역할 찾기, 좋은 아버지의 습관 배우기 등 다양한 강좌를 마련해좋은 아버지 되기를 돕는 대표적인 모임이다. 6주 코스의 교육은 기독교 신자용 강좌와 일반인 대상 강좌로 나뉘며 전 과정을 마치면 ‘아버지면허증’을 발급해준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은 YMCA를 중심으로 91년 탄생한 이래전국적으로 확산돼왔다. 초창기 가장 활발했던 서울YMCA 소속 모임은 최근중단됐지만 원주(033-742-7649) 구리(031-556-3322) 광명(02-754-7891) 목포(061-283-8055) 안동 (054-854-4596)등에서는 여전히 활기차게 움직이고있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기차여행, 아버지 요리잔치, 아버지 역할훈련 강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
두란노 아버지학교(02-3785-0696)는 무너진 가정을 회복시키고 사랑과 겸손, 리더십이 몸에 배인 아버지로 거듭나자는 것을 목표로 95년 만들어진 단체. 5주 일정의 부자간, 부부간 치유와 회복에 초점을 둔 강의를 한다.
딸사랑 아버지 모임(02-2273-9535)은 호주제 폐지와 평등 가족문화 만들기에 관심있는 아버지들이 지난해 6월 만들었다. 딸 아들 평등하게 키우기,육아와 가사노동 분담, 성차별 제도의 공론화 등 사회활동에 초점을 두고있다.
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가 운영하는 좋은 아버지 교실(02-424-8377)도 있다. 5주 일정 아버지 교육 강좌를 진행한다.
이론강좌는 아니지만 놀이와 자선활동을 통해 좋은 아버지 역할을 실천하는 모임도 있다. 다정다감한 아버지 상을 심겠다는 목표로 92년 결성된 동화구연아버지회(02-967-9787)는 홀수달에 한번씩 고아원을 찾아 동화구연행사를 갖고 아버지 역할에 대한 노하우를 나눈다.
파파스클럽(www.papasclub)은 재미있는 놀이를 매개로 아버지와 자녀들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준다. 가족이 함께 즐기는 당일치기 여행이나 감자캐기 여행 등을 회원제로 운영한다.
또 아부지닷컴(www.abuji.com)은 아버지들이 서로의 고충을 상담, 토론하고 양육 정보를 공유하는 온라인 사이트로 인기를 얻고있다.
/이성희기자
■아버지를 잃어버린 사내아이들
남자애들이 약해졌다? PR매니저 일을 하는 김영민(40ㆍ안양 평촌동)씨는 8살배기 외동아들이 너무 계집애 같은 것 아닌가 고민이다. 2월생인 아들에게 올해 입학통지서가 나왔지만 입학을 내년으로 미뤘다. 동갑인 사촌 여자아이에 비해 턱없이 어리고 소극적인 아들이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였다.
“얘가 마마보이예요. 사내아이답게 씩씩하고 장난도 심하게 치고 그러면 좋겠는데 엄마 뒤에 꼭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늘 엄마를 찾아요. 교사인 아내가 아이와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서일까요?”
벤처회사에 다니는 김정갑(43ㆍ서울 관악구 봉천동)씨는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가 너무 얌전한 것 같아 걱정이다. “위로 누나가 둘이라 여성화하는것 아닌가 싶어요. 아들답게 키우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하지요.”
남자 아이가 너무 연약하다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성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반면 여자아이들은 드세졌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여자아이들의 발육상태가 남자아이보다 빠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자라도 남자 못지않게 키우겠다는 열성 엄마들이 많아진 증거이기도 하다.
한 자녀 가정이 많아지면서 모두가 외동아이 혹은 외아들이 되는 핵가족시대, ‘개구장이라도 좋다, 씩씩하게만 자라다오’라는 남성화의 신화는 이제 종언을 고할 때가 된 것일까.
●약해진 남자아이, 역할모델이 없다.
아버지학교를 운영하는 하이패밀리 사무총장 이의수씨는 남자아이들이 연약해지는 이유로“남자아이들은 남성으로 태어나지만 인격형성의 가장 중요한 유소년기 사회화를 전적으로 여성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당장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봐도 거의 90%, 초등학교도 70%이상이 여자교사입니다. 더구나 아빠들은 늘 ‘바쁘다’는 핑계로 가정육아조차 엄마에게 미루지요. 여성적인 태도와 시각을 전수받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 아닐까요?”
실제로 월간 ‘좋은 엄마’가 부모들을 대상을 아빠의 육아 참여시간에 대해 물었더니 평일 0시간, 휴일 0시간 이라는 대답이 12.5%나 됐다.
육아에 참여하지않는 이유는 응답자의 대다수인 57.5%가 ‘직장생활로 인한 스트레스’를 들었다. 또 지난해 발간된 2002 청소년보호백서에 따르면 초등학생의 10%, 중학생의 17%, 고등학생의 22%는 아버지와 하루에 단 1분도 대화를 하지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소년기 아버지의 부재는 아이의 지적, 사회적, 정서적 발달에 상당히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칼 스미스의 연구(1984) 결과 , 유아기에 아버지 부재를 경험한 아이들은 수리능력이 떨어지고 성취동기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남자아이는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통해 사고 감정, 행동, 성격을 모방하게 되는데 아버지와의 관계가 없으면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문제해결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년 이후 남성의 자살율이 높은 것도 아버지가 적절한 역할모델을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물론 남자아이들이 여성스러워졌다는 것이 곧 연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서강대 교양학부 정유성교수는 “여자아이들이 터프해졌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남자아이들이 연약해졌다는 시각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말한다.
“오히려 쓸데없는 사내노릇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부드러워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난 2,3년간 여성들의 평등의식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데 비해 남성들은 기존의 가부장적 의식을 고수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시각에서 보면 남성이라는 것이 꽃미남이거나 터프가이로 이분되는데 이런 규격화된 남성상에 맞지않으니까 계집애 같아졌다는 말이 나오는 거지요.
그러나 남자라고 감성적이지 말라는 법이 있나요? 문제는 육아과정에 참가하지않음으로써 남성 스스로 소외되고 그런 비정상적인 가부장적 태도가 자기성찰 없이 대물림되면서 가족 구성원들을 힘들게 한다는 데 있지요. 아이들은 부모를 닮잖아요.”
●다시 문제는 '아버지'다.
초등학생 아들만 둘을 둔 주부 이종원(39ㆍ서울 마포구 성산동)씨는 일중독이라 육아에 거의 참가하지 않는 남편에 대해 원망스럽기 보다 “걱정스럽다”고 말한다.
“얼마 전 남편이 18일 동안 출장을 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한번도 아빠를 찾지않는 거예요. 내가 ‘아빠 보고싶지 않어?’ 그러니까 겨우 ‘보고싶지’ 그러고 말데요. 지금은 젊으니까 괜찮지만 남편이 나이 들고 아이들도 크면 부자관계가 얼마나 더 서먹하겠어요. 가끔 시아버님과 남편 형제들이 함께 저녁식사를 할 때가 있는데 서로 거의 말이 없어요.
남편은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부자간의 유대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않은 거죠. 어린시절 살가운 정을 들이지 않았는데 큰다고 저절로 부자간의 정이 생기나요? 자업자득이다 싶지만 한편 남편이 불쌍하지요. 제대로 된 아빠노릇을 배우지못한 셈이니까요.”
하이패밀리 송길원 대표는 “결국 아들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연령대에 맞는 올바른 아버지 역할로 3C론을 내놓는다.
“한창 몸을 쓰는 유년기에는 인라인스케이트나 축구를 가르치고 같이 하는 코치(Coach), 동성으로부터의 절대적 지지와 관심이 필요한 사춘기에는 적절한 카운셀러(Councellar), 청년기에는 인생의 친구이자 동반자(Companion)로 적절히 제 역할을 찾아서 하는 아버지가 되어야합니다. 좋은 아버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거든요.”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몸으로 이야기하는 김정섭씨 父子
화요일 오후 5시. 일찍 퇴근한 김정섭(43)씨는 아들 재홍(9ㆍ행림초2)이와 함께 학교운동장에서 축구공을 차느라 진땀을 흘렸다.
운동장은 태풍 ‘송다’가 아침 내내 뿌린 비로 곳곳에 물 웅덩이가 패였지만 신명이 난 어린 ‘축구황제’의 발길은 거침이 없다. 서로 공을 뺏앗느라 몸싸움도 불사하다 보면 어느새 땀 범벅이 되기 마련. 이젠 제법 공에 힘을 실어 묵직하게 차낼 줄 알게 된 아들이 대견해 마음까지 뜨거워진다.
김정섭씨는 올 봄 아버지학교에 다니면서 “진짜 아빠로 거듭 났다”고 말한다. “전엔 자식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되는 줄 알았어요. 지금은 스스로에게 늘 다짐합니다. ‘몸으로 사랑하자’ 라구요.”
위로 딸 둘까지 세 자녀를 둔 김씨가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것은 지난해였다. 전업주부였던 아내가 취업준비를 하면서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던 시기. 뭐든 완벽하게 정리정돈이 돼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깔끔한 성격을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요구한 것이 문제였다.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아이들 뒤꽁무니를 쫒아다니며 잔소리와 폭언을 해대고 감정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저녁식탁을 차리고 아이들을 불렀으나 아이들은 TV에 정신이 팔려 꼼짝도 안했다.
홧김에 반찬통을 거칠게 내려놓는다는 것이 그만 식탁을 튕기고 날아가 큰아이의 얼굴을 강타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픈 것보다 공포로 휘둥그레진 아이들의 여섯 눈동자가 호러무비의 한 장면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나 스스로 너무 놀랐어요. ‘오, 하나님’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구요. 그날 저녁 한 잠도 못잤습니다. 내 속의 폭력성에 놀라고, 아빠 자격이 없다는 자괴감 때문에 괴로웠어요. 생각해보면 결혼해 애들이 생겼으니 그저 아빠가 된 것일 뿐, 제대로 된 아버지역할은 배운 적이 없었지요.”
아버지학교 모임을 나가면서 김씨는 아버지 역할은 마음이 아니라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스스로는 늘 가정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주고 강요하는 관계였다는 것도 깨달았다. ‘몸으로 부딪치자’는 다짐을 그때부터 했다.
“늘 허리가 좋지 않아 운동은 질색이었는데 가만 보니까 재홍이가 한창 몸을 움직이고 싶어하는 나이예요. 어려서는 누나들하고 잘 놀았는데 초등학교 들어가니까 누나들은 거친 놀이를 싫어하잖아요. 생전 처음 인라인스케이트라는 것을 타게 되더라구요.”
연구원 생활을 하다 독립, 벤처회사를 꾸린지 얼마 안돼 바쁜 시기라 김씨의 퇴근시간은 보통 밤 8시. 그래도 주중 3,4일은 어김없이 한밤에 아이들과 운동장에 나선다.
재홍이는 축구에 한참 맛을 들였고 딸들은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긴다. 4월 허리디스크 수술을 한 상태라 어른들이 보면 손사래를 치겠지만 김씨는 요즘 비로소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하고있다는 기쁨을 맛보고있다. 그래서일까. 평소 아빠의 귀가시간에 별 관심이 없던 아이들도 요즘은 초저녁부터 “아, 아빠 몇시에 오시지?”라며 챙기기 시작했다.
“운동이 끝나면 언덕바지에 있는 집까지 막내를 업어줘요. 등에 아들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는 것만도 행복한데 함께 운동을 시작한 뒤로 아들은 그냥 업히는 게 아니라 양팔로 나를 꼭 안아줍니다.가슴이 뻐근하지요. 아들이 남자답게 크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요. 그러려면 좋은 기억을 많이 갖고 있어야할 것 같아요. 몸과 몸이 공감하는 이 따뜻한 순간들이 도움이 되겠지요. ”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동화구연 아버지회 편사범씨 父子
“아이가 제법 큰 다음부터 ‘나는 니 아비가 아니라 친구’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아이를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의미도 있고 서로를 객관화하면서 독립적으로 키우기 위한 것이지요.”
웅변학원을 운영하면서 동화구연 아버지회 회장으로 활동하고있는 편사범씨는 외아들 승원이(17ㆍ경희고2)와 친구처럼 지낸다. 승원이는 딸을 낳은지 6년만에 얻은 아들. 중장년층 학부모들이 대개 그렇듯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 애지중지하다가 과잉보호의 병폐를 깨달았다.
“딸은 대여섯살부터 혼자 놀이터에 나가도 걱정이 안됐는데 아들은 아니더라구요. 집앞에 심부름을 보내도 안절부절하고 차조심해라, 뛰지마라, 혼자 어디가지 마라, 늘 안달복달하는 거예요.
그러니 아이가 너무 소극적이 되고 발음도 불분명하고 부모 뒤에 숨어서 통 나오지를 못해요. 뿌리깊은 남아선호사상이 오히려 아이를 버린거죠.”
가만 보니 그건 아들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유년기 동안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보다 발육도 늦고 수동적이었다. 딸은 내놓고 키우면서 아들은 과보호한 것이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때부터 편씨는 전략을 바꿨다. 적극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키우려면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를 객관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초등학교때부터 자신이 활동하는 동화구연 아버지회의 일원으로 고아원 봉사활동에 데리고 다녔고 아들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격려했다.
“한번은 아들이 축구를 하다가 손목인대가 늘어났어요.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길래 주말에 있는 축구시합에 못나가게 했죠. 골키퍼라 손을 많이 쓰거든요. 그런데 아들이 이러는 거예요. ‘아빠가 만일 친구라면 손목붕대를 감고서라도 팀을 위해 참가하라고 했을 것 아니냐, 이건 친구로서의 태도가 아닌것 같다.’ 따끔하데요. 다 컸다 싶어요.”
친구로 자라면서 아들은 부쩍 성숙했고 부자관계는 훨씬 밀접해졌다. 얼마전엔 아들이 자위행위를 하는 것 같다며 걱정하는 아내를 대신해 ‘남자끼리의’ 밀담을 성공적으로 마치기도 했다.
“사실 그 나이 또래 남자아이들 누구나 고민하는 문제거든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중요해요. ‘무리하지 말고 적절히 해라, 몸 상한다’ 그러면서 윙크를 해줬죠. 씩 웃더라구요.”
아들은 요즘 대학입시 문제로 생각이 많다. 편씨는 늘 그렇듯 아들 생각을 최대한 존중할 생각이다. “이제부터는 제 갈 길을 잘 가는지 지켜보는 인생의 선배 노릇을 해야죠. 친구이자 인생선배, 아버지로서 이만한 복이 있을까요?”
/이성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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