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10일 가수 호세 펠리시아노가 푸에르토리코 라레스에서 태어났다. 위로 형이 여섯 있었고, 동생이 넷 더 태어날 예정이었다. 집은 가난했고, 설상가상으로 그는 날 때부터 시력이 없었다. 캄캄한 세상에서 출발한 그의 삶에 별다른 빛이 내리비치리라고는 가족들조차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쉰아홉 번째 생일에 되돌아보는 호세 펠리시아노의 삶은 휘황한 빛으로 충만하다.호세 펠리시아노는 영어권 음악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첫 번째 라틴계 가수다. 그가 열어놓은 문을 통해 수많은 라틴계 가수가 미국 시장으로 들어가, 오늘날 미국 방송에서 스페인어 노래를 듣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살아있는 세고비아'라는 헌사가 가리키듯, 호세 펠리시아노는 또 생존하는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꼽힌다. 그는 여섯 차례의 그래미상 수상을 비롯해 대중음악상을 수없이 받았고, 빈심포니, 런던심포니를 포함한 최고의 클래식 교향악단과 협연했다. 코네티컷주 페어필드의 세이크리드하트(聖心)대학은 그에게 명예문학박사학위를 수여했고, 뉴욕시는 이스트할렘구역의 한 공립학교에 호세 펠리시아노 공연예술학교라는 이름을 붙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1994년 크리스마스 때 그를 바티칸으로 초대하자, 네 해 뒤 크리스마스에는 클린턴 대통령 부부도 그를 백악관으로 초대했다. 그는 조엘 코엔 감독의 '파고'를 비롯해 몇몇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세 펠리시아노의 가장 큰 축복은 '레인' '라잇 마이 파이어' '콴도 엘 아모르 세 아카바(사랑이 끝났을 때)' '포르케 테 텡고 케 올비다르(왜 내가 널 잊어야 하나)' 등 그가 영어나 스페인어로 부른 수많은 노래들이 세계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호세 펠리시아노는 미국 국가를 대중적 스타일로 불러 빌보드차트에 올린 첫 번째 가수이기도 하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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