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은 ‘영웅’에 이은 장이모의 두번째 무협영화다. ‘영웅’을 이미 본 관객이라면 ‘연인’의 정체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거대한 ‘공갈빵’의 맛과 같은 대륙적 과장의 허장성세를 질리도록 즐길 수 있는 영화다. 카메라가 화살을 따라가는 것은 약과. 대나무 숲에서 벌어지는 혈전에서 자객들이 던진 창들이 질서 정연하게 꽂혀 주인공들을 가두는 것도 신기한데, 급기야는 대결 중에 계절이 바뀌는 일까지 벌어진다.도무지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지만 진정하는 수밖에 없다. ‘삼국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김용의 ‘영웅문’과 같은 무협소설에서 질리도록 봤던 것이 바로 이 과장된 판타지였기 때문이다.
무협영화의 스펙터클한 측면에서 ‘연인’은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 준다. 특히 영화 전반 1시간 무렵까지는 무협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이 나온 게 아닐까라는 흥분마저 자아낸다. 당나라 말기가 배경인 ‘연인’은 역모를 꾀하는 자객 조직의 맹인 여성 메이와 그녀를 동시에 사랑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삼각관계의 러브스토리이며, 상당 부분을 추적장면으로 채우고 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평원과 사방이 꽉 막힌 숲에서, 빠져나갈 데 없는 폐소 공포증을 느끼며 절체절명의 싸움을 벌이는 여주인공 메이가 장님이기 때문에 관객에게 보이는 것과 메이에게 들리는 것이 중첩되면서 시청각적 긴장이 최고치까지 올라간다.
이 영화는 칼과 칼이 부딪치고, 몸이 격하게 타격하고, 타격을 받는 모든 순간을 격렬한 정념의 시각적 번역으로 그려낸다. 이걸 따라가지 않을 때 아크로바틱한 기예 전시나 특수효과의 현란한 유희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대다수 액션장면은 시시하게 보일 것이다.
1985년 감옥 영화 ‘거미 여인의 키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브라질의 헥터 바벤코 감독이 고국으로 돌아가 만든 영화 ‘카란디루’는 상상하기 힘든 지옥도로 관객을 초대한다. 어떤 한 의사가 12년 동안 죄수들을 돌봐준 경험을 담은 베스트셀러 책을 영화로 옮긴 이 영화는 에이즈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고, 마약을 일상적으로 흡입하며, 언제 죽어나갈지 모르는 감옥의 현실을 극사실주의로 파고든다. 밑바닥에 떨어진 인간들의 면면을 끈질기게 관찰한 끝에 거꾸로 인간성에 대한 갈구와 존경을 담아내는 것은 알 수 없는 이 영화의 저력이다.
동시에 숨쉴 틈 조차 주지 않는 듯한 영화 속 감옥 세계에서 태평하게 일상적인 삶을 사는 죄수들을 보며 체제가 가두지 못하는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의 정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의 말미에 터지는 엄청난 집단 폭력극은 끝까지 온기를 바라는 관객의 마음을 무너뜨리며 가차없이 현실을 직시하라고 냉정하게 조언하고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시크릿 윈도우’에는 조니 뎁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스티븐 킹과 조니 뎁의 궁합만으로도 이 영화는 관심을 끌만한 매력이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인생의 위기에 직면한 소설가이며 그의 불안감과 죄의식은 조니뎁의 섬세한 연기를 통해 잘 표현된다.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주위 세상과 완전히 유리돼 있다는 것만큼 공포스런 삶은 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실감시킨다. 따끔하게 즐길 수 있는 가작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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