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이 말끔히 청소한 성당 주변은 어느 때보다 청정했다. 물기를 머금은 촉촉한 바닥이 발걸음을 가볍게 했고, 저녁 미사의 낭랑한 기도소리는 마음을 씻어주었다.태풍 ‘송다’가 지나간 6일 저녁 서울 중구 명동성당. 갈수록 신산한 세상살이에 몸도 마음도 지친 사람들이 잠시나마 시름을 떨치고 영혼의 목을축이기 위해 노(老)사제 앞에 모여 앉았다.정진석(73)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 오후 7시부터 두시간 동안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으로 펼친 강좌.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평협ㆍ회장 손병두)가 ‘현대인을 향한 영혼의 울림’이라는 주제로 총 12회에 걸려 마련한 하상신앙대학 첫번째 시간이었다. 하상은 한국최초의 평신도 출신 성인 정하상(1795~1839)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정 대주교는 이날 인간의 탄생과 죽음, 욕망과 행복 등이 무엇인지 등을 짚어갔다. 어디선가 한번쯤 들었을 법한 내용임에도 그의 자상한 강론은 대성당을 꽉 메운 청중들의 굳은 얼굴을 펴주고, 닫힌 마음을 열어주었다.
정 대주교는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옛 유행가 ‘하숙생’을 부른 후 말씀을 시작했다.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맨손 알몸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욕망에 사로잡혀 이를 잊고 지냅니다.” “육체가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영혼은 비물질로 이루어졌습니다. 물질은 변하는 것이지만 영혼은 변하지 않습니다. 영적 존재인 사람은 육체적인 욕구보다는 지성적 욕구를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는 가정의 소중함도 역설했다. “가정은 행복의 기초이자 목적”이라면서 “오늘날 가정해체 현상이 무척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가정이 불행하면 다른 곳에서 성공해도 불행합니다.다른 것을 실패해도 가정이 행복하면 성공한 삶이죠.” 특히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드는 고즈넉한 석양 무렵, 평생 해로한 배우자의 얼굴을 감개무량한 눈빛으로 그윽이 바라보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강조했다. 반대로 교만, 인색, 욕구, 분노, 질투, 태만 등은 행복에 장애가 되면서 ‘죄의 근원’이라고 규정했다.
이번 강좌는 당초 500명 정도의 수강생을 예상했으나, 신청자가 1,000명을 넘을 만큼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주최측은 이날 참석자가 “대부분 40대 중반 이후의 남성들로 가톨릭 신자 외에도 불교, 기독교 신자도 상당수 있으며 수도권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올라온 사람도 있다”고 밝혔다.손병두 평협회장은 “명예퇴직자, 실업자들이 강좌에 큰 관심을 보였다”면서 “삶의 지표를 찾아 헤매는 현대인들에게 성찰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자리”라고 말했다. 강좌는 11월 30일까지 매주 화요일에 열리며, 강의 내용은 테이프와 함께 책으로도 펴낼 예정이다. (02)777-2013, 757-7851.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