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먼저 호수로 찾아온다.서늘해진 밤기운을 타고 새벽 물안개가 피어 오르면 가을이 가슴 속 깊은곳으로 서슴없이 파고든다. 도시의 번잡함을 피해 가을을 마중나간 여행길에서 때묻지 않은 청정지역인 전북 임실의 옥정호를 찾았다. 바람을 타고온 계절이 잔잔한 수면위로 소리없는 파문을 일며 다가왔다.
전북 임실군 운암면과 강진면, 정읍시 산내면 일대에 걸쳐있는 옥정호는 물 맑은 섬진강의 최상류에 들어앉은 드넓은 호수. 물이 가득 차면 호수 면적이 26.5㎢로 전북에서 가장 큰 호수이지만 아직 세상에 덜 알려진 덕분에 순박한 모습과 웅숭깊은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옥정호를 만든 섬진강댐 공사가 시작된 건 1961년. 산 넘어 만경, 김제 평야의 농업용수를 제공하기 위해 조성됐다. 이 때문에 주변 5개면의 수몰지역 주민들은 부안 계화도 간척지로 강제 이주해야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계화도 땅을 팔아 고향으로 되돌아 왔는데 물속의 마을을 한탄하며 마신 막걸리 값으로 땅 판 돈을 죄다 날렸다 한다. 65년 홍수로 예정보다 일찍 물이 찬 옥정호는 수몰민의 한을 그대로 품은 채 지금의 서럽도록 고운 자태를 갖추게 됐다.
옥정호의 일출이 가장 아름답다는 운암면 용운리에서 새벽 호수를 맞았다. 시간도 멈춘 듯한 정지된 풍경. 갑자기 호수의 섬에서 울리는 개 짖는 소리에 여명이 밝아오더니 섬을 휘돌아 오르는 새떼의 날갯짓이 호수 위에 스르르 물살을 일으켰다.
밤잠을 설치며 기다렸던 호수의 가을 운해는 궂은 날씨 탓에 만나지 못했다. 전날 내리던 비가 아침까지 흩뿌렸고 호수의 안개 대신 먼 산 연봉이 아스라이 구름옷을 피워냈다.
일출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호수의 전경이 가장 잘 보인다는 국사봉에 올랐다. 해발 475m의 봉우리를 오르는 길은 나무 계단길이다. 20여분 팍팍한 허벅지를 두들기며 오르니 저 멀리 운암대교까지 한눈에 들어오며 전경이 확 트인다.
호수를 둘러싼 산들은 강원도처럼 험준하지도, 충청도처럼 나지막하지도 않다. 소담스런, 하지만 꽉 차있는 듯한 산들이 줄을 이어 연봉의 파노라마를 펼치는데, 입이 절로 벌어진다.
호수의 한가운데 떠있어 옥정호를 더욱 빛나게 하는 예쁜 섬의 이름은 ‘외안날’. 수몰되면서 고립된 이곳에는 팔순의 할아버지 한 분과 젊은 부부 등 2가구가 살고 있다.
용운리 주민들도 이 섬에 배로 드나들며 농사를 짓는다. 가을을 부르는 옥정호에는 여전히 여름의 흔적이 짙게 깔려있다. 어느 해 보다 뜨거웠던 여름 때문에 호수에는 녹조가 두껍게 드리워졌다. 마치 고운 이끼가 물위에 내려앉은 듯 하다.
옥정호의 절경은 국사봉이나 용운리에서만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운암대교에서 보이는 호수는 새로 지은 카페, 별장 건물과 어울려 이국적인 모습이고, 섬진강댐 부근의 산내면 황토리에서 보이는 호수는 넉넉한 품이 아늑하다.
산굽이 물굽이를 끼고 도는 옥정호 호반길은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그림같은 풍경이 보이는 곳마다 전망대가 들어서 있어 차를 세워두고 편안하게 빠져들 수 있다.
/옥정호(임실)=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김용택 시인이 걷던 섬진강 길
그대가 보고 싶을 때/ 보고싶은 마음을 달래며/ 저무는 강으로 갑니다/ 소리없이 저물어가는/ 물 가까이 저물며/ 강물을 따라 걸으면/ 저물수록 그리움은 차올라/ 출렁거리며 강 깊은 데로 가/ 강 깊이 쌓이고/ 물은 빨리흐릅니다.(김용택의‘땅에서’)중에서
물 맑은 섬진강은 전북 진안군 백운면의 팔공산에서 시작한다. 이곳에서 발원한 물은 임실군의 옥정호에 잠시 갇혔다가 순창 남원 곡성 등을 굽이치고 여러 지천과 만나 전남과 경남의 경계를 이루며 남해로 흘러 든다. 총 500리의 긴 여정이다.
옥정호는 섬진강댐 아래로 실낱 같은 물줄기를 흘려 보낸다.
이 물길이 구림천 등과 만나 제법 강물답게 굽이쳐 휘도는 곳이 임실군 장산리(長山里) 진메 마을, 시인 김용택이 나고 자란 곳이다. 길 장(長) 메산(山), 긴메를 주민들이 진메라 불러 진메마을이 됐다. 마을 앞 강 너머산자락이 높이에 비해 옆으로 길게 뻗어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모든 집에서 강까지는 몇 걸음 되지 않는 전형적인 강마을이다. 시인은 이곳에서 주변의 산과 들, 나무와 풀, 강물과 논밭을 노래해왔다. 시인이 ‘서럽도록 아름답다’고 했던, 시인의 단어를 만들어낸 서정(抒情)의 강변이 바로 이곳이다. 검은 암반위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 낮게 드리운 집들, 강가에서 한가로이 풀 뜯는 염소떼. 비가 적시는 마을앞 강변은한편의 묽은 수채화였고 한편의 시였다.
마을 앞에는 시인이 어릴 적 심은 느티나무가 한아름 둥치로 커서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진메마을에서 강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비포장이다. 차를 세워두고 오랜 만에 흙길을 밟아봤다. 폭 2m도 안되는 길은 진초록의 풀섶을 양 옆으로 하고 강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얼마를 그냥 걸었을까, 들리는 건 강물소리, 이름 모를 새소리 뿐. 강물 한가운데 시커먼 바위가 불쑥 튀어나와 흰 포말을 일으키고 그 위로 백로가 긴 날갯짓이다.
검정 물잠자리, 색색의 나비가 희롱하며 길동무를 해준다. 길가 풀섶에는 붉은 보라빛 참싸리꽃, 노란 봉오리를 수줍게 닫고 있는 달맞이꽃 등 늦여름의 꽃들로 화려하다.
길의 끝은 시인이 섬진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 했던 천담마을이다. 시인은 90년대 초 2년 간 진메마을의 집에서 천담마을의 천담분교까지 4㎞ 되는 이 비포장길을 매일같이 걸었다.
그는 “이 학교길, 강길 10리길이야 말로 천국의 길이었다”고 했고 “그길을 걸으며 자연의 세세한 변화에 경이로움과 신비감을 느꼈다”고 했다. “눈곱 만큼도 지루하지 않고 순간순간 계절계절이 즐거웠고 행복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다”는 그 길이다.
천담마을과 그 아래 구담마을은 손대지 않은 수더분한 맛이 있는 마을. 구담마을의 느티나무 언덕은 영화 ‘아름다운 시절’에서 아이들이 창희의 가묘를 만들어주던 곳이다. 이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섬진강은 치맛자락이 휘감기 듯 바로 앞을 휘돌아 나간다.
이 물은 순창군 동계면의 장구목에서 또 한번 화려한 풍광을 연출한다. 찻길이 막혀 차로는 천담마을 앞에서 나가 순창 동계로 해서 멀리 돌아가야한다.
장구목은 섬진강에서도 강바닥 암반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그 바위들 중 가장 유명한 바위가 요강바위. 한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게 생긴 이 기묘한 바위는 도둑들이 부잣집에 정원석으로 팔려고 훔쳐갔던 것을 주민들이 어렵게 되찾아온 사연을 갖고 있다.
장구목은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주요 배경으로 나왔던 곳. 신하균이 누나를 묻은 곳이 이 곳이고 송강호가 신하균의 아킬레스건을 자르며 복수했던 곳이 장구목이다.
/섬진강(임실)=글ㆍ사진 이성원기자sungwon@hk.co.kr
■여행수첩] 섬진강 여행
● 가는길
호남고속도로 태인IC에서 나와 30번 국도를 타고 임실 방면으로 향하면 섬진강댐에 이른다. 그 전에 칠보읍을 지나 산내에서 좌회전, 715번 도로를타고 오르면 옥정호 호반순환로인 749번 도로를 만난다.
외안날섬이 보이는 국사봉은 운암대교 북쪽으로 20여분 가면 된다. 전주를거칠 경우 구이 방면 27번 국도를 타면 운암대교까지 연결된다.
진메마을은 27번 국도를 타고 순창 쪽으로 내려가다 덕치면 일중리 일중교를 지나자 마자 좌회전해 시멘트길로 들어서 신촌마을을 지나면 나타난다. 진메마을에서 천담마을로 이르는 강변길은 비포장이지만 천담에서 구담마을까지는 포장돼있다. 장구목까지는 천담마을로 되돌아와 강 건너 717번도로를 타고 조금 내려간다.
순창군 동계면 표지판이 보이자 마자 오른쪽 ‘Farm Stay마을’ 간판이 선길로 진입해 ‘장구목가든’ 이정표를 따라 가면 나온다.
● 숙박
운암대교 인근에 리베라(063-222-6866), 리버사이드(221-7968), 하얀집모텔(221-2590) 등이 있고 국사봉 인근에 국사봉모텔(644-0440)이 있다. 장구목의 장구목가든(653-3988)에서는 민박이 가능하다. 1시간 거리인 순창군 회문산 자연휴양림(653-4779)의 통나무집도 이용할 만하다.
● 먹거리
깨끗한 섬진강을 끼고 있어 임실군의 많은 식당에서 다슬기탕을 맛볼 수 있다. 옥정호, 특히 운암대교 주변에는 민물매운탕집이 몰려있다. 주민들은 섬진강댐 아래 덕치면 회문리에 있는 강산에(643-5786)의 땅두릅 민물매운탕을 별미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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