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8년 8월30일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파리에서 태어났다. 1825년 졸(卒). 다비드는 18세기 말∼19세기 초 프랑스 화단을 주름잡던 고전주의 회화의 영수였지만, 당대의 정치 흐름에 깊이 연루된 정객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다비드는 자코뱅당원으로서 새로운 프랑스 건설에 앞장서다가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자코뱅 지도자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뒤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는 브뤼메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에게 발탁돼 궁정화가로서 프랑스 화단을 쥐락펴락했고, 나폴레옹이 실각한 뒤에는 벨기에로 추방돼 브뤼셀에서 삶을 마쳤다. 테르미도르(더위의 달)니 브뤼메르(안개의 달)니 하는 새로운 달이름들을 채택한 프랑스 혁명기의 공화력도 다비드가 그 일원이었던 국민의회 내 공화력제정 특별위원회에서 만든 것이다.
당대 정치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터라 다비드는 다분히 '정치적인' 그림들도 여럿 그렸다. 자코뱅 지도자 장 폴 마라가 지롱드당 지지자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제 집 목욕탕에서 암살당하는 장면을 그린 '마라의 죽음'(1793)이 혁명기의 대표적 정치화(政治畵)라면, 나폴레옹이 스스로 대관한 뒤 황후가 될 조제핀에게 관을 씌워주는 장면을 그린 '나폴레옹1세의 대관식'(1807)은 제정기의 대표적 정치화라 할 만하다. 또 고대 로마의 도시국가 시절을 배경으로 그린 '호라티우스형제의 맹세'(1784)는 루이16세의 주문을 받아 만든 작품이니, 다비드는 만년의 왕정복고기에 겪은 수난을 제외하고는 왕정기, 혁명기, 제정기를 거치며 권력자들과 가까웠던 '체제예술가'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드러낸 정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어기찬 애국자였고, 장 오귀스트 앵그르, 앙투안 그로, 프랑수아 제라르 등 19세기 고전주의 화가들의 훌륭한 스승이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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