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박사의 선물에밀리오 파스쿠알 지음/배상희 옮김
주니어파랑새 발행/1만3,000원
예수가 태어났을 때, 멀리서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귀한 예물을 바쳤다. 스페인 아이들은 매년 1월5일 밤, 동방박사들이 선물을 준다고 믿는다. 성 니콜라스가 커다란 빨간 자루를 메고 아이들이 있는 집을 찾아 다니는 크리스마스 이브처럼, 아이들은 동방박사를 기다린다.
현역 스페인 작가 에밀리오 파스쿠알의 소설 ‘동방박사의 선물’은 방황하는 열 여섯 살 소년이 받은 아주 특별한 선물에 관한 애틋하고 감동적인이야기다. 주인공은 여덟 살 때 알았다,
동방박사는 없다는 것을. ‘당혹스럽고 버림받은 느낌’과 함께 ‘동방박사가 사라지자 다른 것도 모습을 감추었다.’ 이를테면 ‘요람에 누운 나를 감싸주던 아버지의 부드러운 휘파람’도.
잃어버린 유년의 작은 행복들을 그리워하는 사춘기 소년의 예민한 감성은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 채 부모의 불화와 갑갑한 학교를 못 견디고 뛰쳐나간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집 우편함에서 뜻밖의 선물을 받기 시작한것이다. 문학사의 고전이 된 책들과 애정어린 짧은 메모, 그리고 가끔 초콜릿도. 동방박사가 다시 찾아온 것일까.
비밀은 책의 마지막 장에서 풀린다. 이 모든 사건은 소년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아버지와 어머니, 여자친구와 문학 선생님이 동방박사가 되어 꾸민 사랑의 음모였다.
특히 아들과 늘 겉돌기만 하던 아버지가 스스로 배우가 되어 연출한 넉 달간의 연극은 가슴 뭉클하다. 한번도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고,문학과 음악을 사랑하는 몽상가이자 실패한 연극배우였던 아버지는 자신의기질과 능력을 아들을 위한 마지막 연극에 바치고 세상을 떠난다.
무대는 지하철역. 가출한 소년은 거기서 기타를 치며 시를 외워 구걸하는 한 장님을 만난다. 그의 제안으로 소년은 하루에 두어 시간씩 그에게 책을 읽어주게 되고, 책을 통해 문학과 인생을 배워나간다.
소년은 장님이 지하철역 사고로 죽은 다음에야 뒤늦게 알게 되지만, 그리고 여러분은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생애 단 한 번 주역으로 연기하고 연출한 작품이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책의 세계로 안내함으로써 세상을 보는 눈을 틔워준 것이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이 소설에는 많은 문학작품이 등장한다. 작가의 조국 스페인의 중세 고전부터 고대 그리스신화와 비극, 셰익스피어와 새뮈얼베케트, 마크 트웨인 등의 영미 문학과 오늘날 남미 작가 보르헤스의 소설, 그리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와 유명한 프랑스 만화 ‘땡땡’ 시리즈까지 40여편에 이른다.
특히 아버지가 가장 사랑했던 ‘돈키호테’ 이야기는 꿈 속에 살다 간 몽상가였던 아버지의 초상 그대로다. 소년의 독서편력을 따라가는 동안, 이들 작품을 읽어본 독자라면 불현듯 다시 읽고 싶어질 것이다. 안 읽어봤다면, 그 책들이 손짓하는 듯한 부드러운 유혹을 받을 것이다.
스페인 아동청소년 문학상을 받은 이 소설은 아름답다. 12, 13세 청소년을대상으로 썼다는데 그 안에 담긴 내용의 깊이나 품위는 오래 묵은 와인을닮았다. 다분히 철학적이고 때로는 냉소적이며, 말을 아끼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소리없는 울림으로 가득 찬 문장이 고전적인 향기를 지녔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잊고 있던 추억을 되찾은 듯한 아득한 행복감과 누추하고 혼란스런 인간존재에 대한 연민이 밀려온다. 와인을 마시듯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책, 음미할수록 더욱 깊은 맛이 나는 책이다.
목탄으로 그린 부드러운 흑백 삽화(하비에르 세라노 그림)도 멋있다. 피카소나 브라크 같은 입체파 화가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화가는 비단자락을 펼치듯 손가락으로 목탄을 문질러서 빛을 펴발랐다. 소년은 몰랐지만, 늘 그의 곁을 지켜줬던 사랑의 빛처럼 그렇게 은근하게.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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