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사법 사상 최초로 26일 서울중앙지법 466호 대법정에서 열린 배심·참심 형사 모의재판은 한편의 할리우드판 법정 드라마였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 두꺼운 서류 뭉치를 넘기며 원고만 읽어대던 전통적 법정 풍경은 사라졌다. 대신 법은 잘 모르지만 재판의 열쇠를 쥔 '일반인' 배심·참심원단을 설득하기 위한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들의 치열한 경쟁으로 재판 내내 활기와 긴장이 교차했다. 대법원 산하 사법개혁위원회가 주관한 이날 재판은 법관에 의한 재판만을 고수해 온 우리 사법체계에 혁명적 변화를 예고하기에 충분했다.이날 재판의 소재로 채택된 사건은 20대 피고인이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낮에 서울 시내 공원에서 40대 여인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강도살인 사건. 실제 사건을 토대로 전문가의 심의를 거쳐 각색됐다.
14명의 배심원단이 법정에 자리하자마자 검찰과 변호인측의 '설득 작전'이 시작됐다. 검사는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이 사건에는 유력한 목격자가 있다"며 "피해자 가족의 억울함을 헤아려 현명한 판단을 바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변호인은 "무고한 시민이 살해됐지만 또 다른 무고한 시민을 범인으로 몰아세우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이어 검찰과 변호인단은 자기측에 유리한 증인을 불러 신문하고 사건현장 지도, 용의자 몽타주 등 증거자료를 대형 스크린으로 배심원단에게 보여주며 치열한 논박을 거듭했다.
배심·참심제의 큰 특징은 공판 중심주의. 이전에 각종 서류로 재판부에 제시하던 증거를 모두 법정에서 직접 제시해 배심·참심원을 설득해야 한다. 이날 검찰측은 "피고인과 사건 시각 당구장에 함께 있었다"고 증언하는 친구에게 "시간을 정확히 기억하느냐"고 공격했고 변호인측은 검찰측이 제출한 '범인 지목 과정' 비디오 테이프가 "억지로 짜 맞춰 만들어졌다"고 물고 늘어졌다. 재판장도 중간중간 검찰과 변호인의 "저 질문은 부당하다"는 이의 신청을 판단, 조율하고 배심원단이 오해할 수 있는 무리한 주장은 "삭제할 테니 판단 근거에서 제외해달라"고 수 차례 요구하는 등 배심원단의 공정한 판단을 돕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이날 재판에는 배심원단의 감정에 호소하려는 듯 "저렇게 선량한 얼굴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겠는가" 라는 등의 감상적 주장이 나오는 등 배심제의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검찰과 변호인의 공방이 끝난 뒤 배심원단은 40분가량의 평의 끝에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평결을 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배심원 선발 어떻게/법원 관할구역내 무작위 추출이 원칙
배심제가 도입되면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판사 대신 유·무죄를 판단하게 된다. 따라서 얼마나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배심원을 선발하느냐가 최대 관건이다.
배심제의 선례가 되는 미국의 경우 배심원단은 만장일치 의견만을 낼 수 있어 합의가 될 때까지 계속 논의를 하게 되며, 그래도 안되면 배심원단을 다시 구성해 재판한다.
26일 모의재판을 앞두고도 사법개혁위원회는 배심원 선발절차에 신중을 기했다. 원래 배심원 선발은 법원 관할구역 내 주민등록이나 선거인 명부를 이용, 무작위로 추출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날은 모의재판인 만큼 참가의사를 밝힌 경우로만 한정했다.
하루 앞서 진행된 배심원 선발과정에서 재판장은 우선 재판에 낯선 37명의 시민들에게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아야만 유죄로 인정된다"는 등 '재판의 원칙'을 거듭 강조했다. 선발과정에 참여한 검사와 변호사도 자신에게 불리할 수 있는 배심원을 가려내기 위해 경찰관을 신뢰하는지, 범죄피해 경험이 있는지 등 다양한 질문을 통해 '편견을 가진 배심원'을 배제했다.
또 후보자의 연령, 지역, 성별, 직업 등도 선정 기준이 됐다. 재판장은 이 같은 절차를 통해 최종적으로 12명의 배심원과 2명의 예비 배심원을 선발했다.
/김지성기자 j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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