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만큼이나 유난히 무더웠던 1994년 7월, 새벽기도를 위해 교회에 들어서던 김현수(49)목사 부부는 깜짝 놀랐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악취를 풍기는 걸레 같은 양말과 땟국이 줄줄 흐르는 운동화. 뒤엉켜 자고 있는 10대 초반 아이들.안쓰러운 마음에 김목사 부부는 아침밥을 먹여 보내면서 “다시 오지 말라”고 했지만 불청객들은 여러 번 몰래 들어와 교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어떤 때는 구석에 똥까지 싸놓고 갔다.
이런 운명적 첫 만남을 겪으면서 김 목사는 가출청소년 ‘대안학교’와 ‘대안가정’의 선생님이자 부모가 됐다. 경기 안산 청소년공동체인 ‘들꽃피는 마을’. 집을 나와 이리저리 헤매는 천덕꾸러기들이 한 줄기 희망을 찾아 들꽃처럼 피어나는 곳이다.
이 마을 ‘이장’을 자처하며 10년이란 세월을 보냈으니 그동안 켜켜이 사연 또한 한 두 가지랴. 때론 가슴 아프고, 때론 즐거웠던 이야기를 ‘똥교회 목사의 들꽃피는 마을 이야기’(청어람미디어 발행)에 털어 놓았다.
말이 쉽지 부랑아처럼 떠도는 아이들을 집에서 데리고 살아가는 일은 그야말로 전쟁이었을 터이지만, 그는 웃음이 넘친다. 아이들과 함께한 10년은 어느 때보다도 보람 이었다고 했다. “아이들의 상처를 문제로 보기보다는 에너지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 품에서 떠난 아이들이 대학도 가고, 결혼도 해서 잘 살고 있으니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 일입니까.”
김 목사는 처음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여덟 명의 악동들을 집으로 데려와‘예수가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살림을 차리겠다고 하자, 노모가 노발대발했다. 대학(한신대) 다닐 때에는 데모하다 2년 넘게 감옥생활했고, 어렵게 목사가 돼서는 노동자교회를 세워 밤낮 감시 당하고 툭하면 체포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시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 술 더 떠 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어머니가 지셨죠.”
이번에는 주민들의 반대로 아파트를 떠나야 했다. 승합차에 아이들을 싣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유랑생활을 하고, 폐농가를 얻어 농장일을 했다.
그는 “이 시절이 힘들기는 했지만 진정 아이들을 이해하고, 또 아이들이 자신을 따르는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담배 피고, 본드 마시고 하는 아이들을 집에서 돌보는 일이 장난이 아니었다. 부인 조순실씨의 일기 한토막. “숨겨둔 본드를 찾아 빼앗자 한 아이가 내 팔을 물어버렸다. 더 물으라고 팔을 들이대니 이번에는 식칼을 들어올렸다. ‘어디 찔러봐라, 난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야’라며 바짝 다가서니 슬그머니 칼을 떨어뜨렸다.”
이렇게 김 목사 부부의 손길을 거쳐간 아이들은 모두 300여명. 자살을 기도했던 아이가 나중에 결혼해 아들 낳아 잘 살고 있기도 하고, ‘들꽃 피는 학교’교사가 된 사람도 있다. 주변 교회와 기업, 복지재단의 후원으로생활교사와 함께 거주하는 그룹홈이 11곳으로 늘어났고, 일흔 여섯 살의 노모도 지금은 초ㆍ중학생 5명을 돌보는 대안가정 운동가가 됐다.
10월9일 ‘들꽃 피는 학교’ 10주년을 맞는 김 목사에게 좋은 소식도 있다. 지난 5월 문화관광부의 모범청소년 및 청소년 육성 유공자ㆍ단체 포상식에서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건축비만 10억원 가까운 연건평 360평(4층)규모의 학교 건물도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는 “이번 공사를 합력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였다”면서 “교회들이 사회의 낮은 곳으로 내려가 나눔을 실천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031)486-8836, www.wahaha.or.kr
/최진환기자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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