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 12주년을 하루 앞둔 23일 양국의 고위외교당국자가 마주 앉아 최대 현안인 고구려사 왜곡문제를 논의함에 따라 귀추가 주목된다.특히 중국 공산당 서열 4위인 자칭린(賈慶林)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의 방한과 맞물려 중국의 입장에 변화가 나타나는 게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도 나오고 있다.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외교부 신임 아시아 담당 부부장의 공식적인 방한 목적은 신임 인사와 자 주석 방한 준비다. 하지만 그는 이날 반기문 외교부 장관과 최영진 차관을 잇따라 면담하고 고구려사 관련 문제를 주로 논의했다.
정부는 이날 우 부부장을 통해 중국측에 다시 한 번 고구려사 왜곡문제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전달했다. 하지만 중국측은 회담 내내 고구려사 문제를 원만히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적인 입장을 되풀이했을 뿐 속 시원한 해결책은 내놓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당국자는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우리측의 우려와 해법을 제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중국이 한국통 우 부부장을 새로 아시아지역 외교 책임자로 임명하고 곧바로 한국에 급파한 것은 중국측 태도 변화의 전조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사흘 전 새로 임명된 우 부부장은 1998년부터 4년간 주한 중국대사를 지내 중국 외교부 내에서는 한국사정에 가장 밝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2001년부터는 일본대사도 역임했기 때문에 역사왜곡논란의 민감성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분석이다.
중국측은 그의 이번 방한을 언론에 노출하지 않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최 차관과의 회담을 마치자 마자 기자들에게 포위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양국은 이번 차관회담을 통해 공통분모를 도출하고 26일 자 주석의 방한을 통해 정치적 타결을 모색할 전망이다. 자 주석은 노무현 대통령과 이해찬 총리 등도 예방할 예정이어서 이 자리에서도 고구려사 문제를 둘러싼 한중관계에 대한 의견 교환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92년 수교 이후 전면적 동반자 관계로 발전한 양국 사이에 고구려사 왜곡문제가 돌출변수로 떠오르는 것은 양국 모두에 부담이 된다. 그러나 이 문제의 논의구도는 이미 복잡다단하게 꼬여있기 때문에 우 부부장 방한 이후 에도 상당기간 진통을 거듭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한 편이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 고구려史 어떻게 보나/中, 내년 "역사교과 표준"이 시금석
수교 12주년을 맞은 한중관계에 최대 암초로 등장한 고구려사 문제에 대한 중국의 시각과 입장, 분위기는 부처마다 학술기관, 학자마다 다양하다.
중국의 고구려사에 대한 역사의식 변화는 1992년 한중 수교이후부터 시작됐지만 이를 둘러싼 한중 갈등이 본격화한 것은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2년 앞둔 2002년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입안되고 유적지 접근 봉쇄가 이뤄지면서였다.
중국은 암암리에 고구려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으면서도 한국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자 대응 방법을 놓고 내부적으로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외교부 홈페이지의 고구려사 부분이 문제가 되자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의 한국사를 모두 삭제하는 등 이 문제에 대해 회피적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수교 12년 만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한중관계 손상을 우려해 합리적인 수준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 외교부가 한국통인 우다웨이 신임 외교부 부부장을 전격 기용한 뒤 방한토록 한 것에서도 고구려사 문제 등을 조기에 원만하게 해결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는 분석도 나온다.
반면 공산당 지도부 일각에서는'위대한 중화(中華) 중흥'의 기치 아래 '고구려사 왜곡'의 산실인 동북공정을 계속 추진하면서 중국민들에게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인식을 확산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특히 동북공정이 중국의 패권적 대중화(大中華) 정책 및 소수민족 통제정책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들이어서 중국측이 고구려사 문제를 호락호락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중국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국사에 대한 방법론에 있어 중국은 '국토 본위'이고 한국은 '민족본위'여서 논란과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다며 역사 방법론부터 재검토해야 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중국 대학 역사교재와 중·고 역사교과서에 '고구려사는 한국사'로 기술돼있지만 '고구려사는 중국사'라는 표현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또 고구려 유적이 몰려있는 지린성 지안(集安) 등 일부 지방 정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고구려사 왜곡에 앞장서고 있다.
중국은 내년 가을 학기 초·중·고교역사 교과서 개정을 앞두고 '역사 교과과정 표준'을 마련 중인데 이 표준안 내용 여부에 따라 한중간 고구려사전쟁의 향방이 가려질 전망이다.
/베이징=송대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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