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으로 TV는 시끌벅적하고, 팬들은 밤잠을 설친다. 그런데 시청자들은불만이 많은 듯 하다. 좋아하는 종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다 보니 방송사입장에서는 시청자 하나하나를 모두 만족시켜줄 수는 없을 것이다.그러나 막대한 인원과 경비를 동원한 올림픽 특집방송이니만큼, 양질의 방송을 담보할 의무는 있다. 더구나 국민의 재산인 주파수를 사용하는 지상파라면 그 책임은 더하다. 질적 수준은 전문성에서 나온다. 과연 우리나라방송사들은 전문성에 대한 책임을 얼마나 느끼고 있을까?
다양한 종목을 골라 중계하고 편성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테네 월드컵’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축구만을 집중적으로보여준다든지, 수도 없이 재방송을 하는 경기가 있는가 하면 정작 중요한경기는 녹화로 보여주는 것은 전문성 이전에 성실함의 문제이다.
시청자는 올림픽을 보지 않을 권리도 있고, 가급적 많은 경기를 볼 권리도있다. 4개 지상파 채널과 3개 전문채널이 엇비슷한 화면만을 지겹게 보여주는 것은 이 두 권리를 모두 제한하는 것이다. 다양성이야말로 방송사가가져야 할 공공성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아나운서와 해설자의 전문성은 종목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적절하게 전달하는 능력이다. 소위 전문가가 나와 일본 축구팀 감독의 이름을 잘못 말하거나 우리 축구팀이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를 만날 수 있다고 보도한다면,어느 시청자가 그 방송사의 전문성을 납득할 수 있겠는가. 화면만 봐도 알수 있는 상황을 부득부득 설명해주는 라디오식 중계나 흥분해서 소리만 지르는 해설은 1970년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개막식 내내 ‘멋있다’만 반복하던 해설자도 있었고,이미 메달권에서 벗어난 상황인데도 남은 두 발 잘 쏘면 동메달은 무난하다고 억지를 부리던 사격 해설자도 있었다.
반면 비교적 경험이 쌓인 아나운서나 해설자는 마치 조용함은 악이라는 강박관념이라도 가진 듯 쉴 새 없이 말을 토해낸다. 코치나 해설자 못지않은전문적 지식과 정보를 가진 팬들이 TV를 보고 있다는 현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전문성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우는 것은 감성적 국가주의이다. 금메달과 태극기, 애국가가 있는 한 그런대로 올림픽 방송의 모양은 갖춘 것이라고 생각하는 안이함은 애국심이 아니라 불성실함이다.
‘우리’ 선수들의 선전에 ‘온 국민이 하나가 되었다’는 흥분된 목소리는 기실 사라진 전문성의 반영일 뿐이다.
냉철한 전망 대신 금메달 후보를 골라내 인터뷰하는 작업에 분주하고, 한국의 승리를 염원하는 외침이 전문적 분석을 대신하고, 인류의 평화보다 ‘한민족의 우수함’이 올림픽의 상징이 된다면,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 얼마나 오래 준비했든 ‘양질’의 방송으로 봐줄 수 없다. 베이징 올림픽에선 어떨지. 우려가 기대로 바뀌기를 바란다.
윤태진/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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