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성장염이 복병이었다.15일 밤(한국시각) 펜싱 여자 에페 8강이 열린 헬리니코 펜싱경기장. 검객김희정(29ㆍ20번 시드)의 칼끝이 헝가리 고수 일디코 민차(12번 시드)를 쉴새 없이 위협했다.
6-9로 밀린 마지막 3라운드. 김희정에게 공격 외엔 다른 선택이 없었다. 하지만 김희정의 칼끝을 얄밉게 피한 민차는 콩타드 어타크(물러나다가 되찌르는 역습)로 오히려 점수차를 야금야금 벌렸다. 1라운드에서 한 점 앞섰던 김희정은 결국 체력이 바닥난 탓인지 9-15로 져 4강 문턱에서 칼을 놓았다.
김희정은 32강전에서 러시아의 옥사나 에르마코바(13번 시드)를, 16강전에서 세계 4위의 리나(중국ㆍ4번 시드)를 차례로 눌렀다. 자신보다 시드가 높은 강호를 짜릿한 역전과 현란한 검술로 누르고 올라온 8강이라 아쉬움이 더했다.
패자는 말이 없는 법. 하지만 김희정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데는 그만한속사정이 있었다. 전날 몇 가락 집어먹은 스파게티가 화근이었다. 함께 먹은 다른 선수는 가벼운 복통에 그쳤지만 예민한 김희정은 급성장염으로 악화했다. 심한 설사와 함께 열까지 났다.
급한 대로 알약이라도 하나 복용했으면 괜찮았을 터인데 도핑검사 때문에그냥 견딜 수밖에 없었다. 경기 당일 코리아하우스에서 준비한 전복죽을 먹은 게 전부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다. 딱 하루를 위해 참고 버틴 인고의 4년을 수포로만들 순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부산아시안게임(2002) 2관왕, 대구U대회(2003) 금메달을 차지한 한국 여자 펜싱의 대들보 아닌가.
그의 투지는 칼끝에 오롯이 전달돼 어려운 경기를 승리로 이끌며 8강까지내달았다. 하지만 기술이 엇비슷한 고수들의 싸움에선 강인한 체력이 승패를 가늠하기 마련. 8강전 중반부터 ‘힘의 싸움’에서 밀린 그녀는 결국 눈물을 삼켜야 했다.
아테네=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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