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천운영 지음/문학과지성사 발행/1만원
소설집 ‘명랑’을 낸 천운영 씨는 “안 본 것은 쉽게 믿지 못하고 잘 쓰지도 못한다”는 작가다. 그녀에게 본다는 것은 오래, 깊이 응시하는 것이다. 응시는 그의 작가적 상상력의 중추적 뼈대다.
한 계간지에 연재를 시작한 장편을 쓰면서 그는 장뇌삼을 숨긴 보따리를 매고 세관을 통과해봤다고 했다. 재중동포 보따리상의 심리를 ‘보기’ 위함인데, 어쩌면 당연하고 누구나 그러할 법한 그녀의 이 말이 그렇게 신선했다. 3년 전 낸 첫 소설집 ‘바늘’이 낯설고 차별적으로 읽힌 것도 이와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명랑’의 접근법은 전작과는 다소 다르다. 서사나 배경의 디테일은 조금밀쳐둔 대신 상상의 영역, 요동치는 삶의 내면을 가운데 앉혔다.
그는 극단의 경계에 서고자 한다. 절대의 거리로 격리된 듯한 그 이질의 거친 단면을 갈아 기어이 맞대 놔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전작이 미추(美醜)의 경계를 더듬었다면 이번에는 생사(生死)의 경계를 보고싶었어요.”
단편들에는 출생 혹은 유년시절부터 죽음이나 버려지는 상황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떼려다 어찌어찌 낳게 된 아이(‘세번째 유방’), 엄마의 숨을 끊고 나온 아이(‘아버지의 엉덩이’), 임신만 시켜놓고 달아난 아버지를 둔 아이(‘늑대가 왔다’) 등이다.
정신적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의 삶은 대체로 기신기신하다. 하지만 죽지못해 사는 것과는 다른 것이, 이들은 제대로 살고싶고, 가능하다면 다시 태어나고 싶다. 죽지 않을 만큼만 배꼽에 칼이 꽂혀 재활하려는 제의(祭儀)적 절차를 꿈꾸고(‘그림자 상자’) 죽은 할머니의 골분을 조금씩 맛보며삶의 욕망을 다스리기도 한다(‘명랑’).
하지만 그들의 욕망은 대체로 충족되지 않고, 상처의 삶들은 끝내 죽거나누구를 죽이는 식으로 좌절한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대체로 우리 삶이그렇지 않더냐”고 반문했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것이 허공에 외줄 타는 것보다 더 어려운 까닭을 뉘에게 물어볼까’냐던 시인(김종철 ‘오이도’)도 있었던가.
문학평론가 김동식씨는 작품 해설 말미에 이런 말을 붙였다. “천운영의 소설들이 묻는다. 당신은 제대로 숨을 쉬고 있나요?”
/최윤필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