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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와 고구려·발해 인식" 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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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와 고구려·발해 인식" 심포지엄

입력
2004.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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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학계가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80년대 중반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 학계를 비롯해 각급 학교 역사교과서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중국은 '고구려사는 한국사'라는 관점을 유지했다. 무엇 때문에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의 인식이 변화했을까.윤휘탁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은 13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주최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 근대사와 고구려·발해 인식' 심포지엄에서 '근현대 중국의 고구려·발해 인식'이라는 논문을 발표, "중국은 국민 통합과 영토 통합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1980년대 후반부터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877년 광개토대왕비의 발견을 계기로 중국 학계는 고구려사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하지만 청일전쟁(1894∼1895) 이후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70년대까지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고구려를 신라·백제와 함께 삼국시대로 파악해 한국사에 포함하는 시각을 유지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 상황은 달라진다. 장멍산(姜孟山) 류쯔민(劉子敏) 등이 "고구려사는 중국사와 한국사 양 쪽 모두에 속한다"는 이른바 '일사양용(一史兩用)'론을 주장했다. 서기 427년 고구려의 평양 천도를 기준으로 그 이전은 중국사, 그 이후는 한국사에 속한다는 것이다. 90년대부터는 '고구려사는 중국사'라는 견해가 중국 학계의 정설로 굳어진다. 리뎬푸(李殿福) 쑨위량(孫玉良) 쑨진지(孫進己) 등이 고구려는 평양 천도 이후에도 민족 구성, 정치 성격에 변화가 없었으며 중국의 지방정권에 불과했다고 주장하며, 고구려사 왜곡 논란을 불러일으킨 '동북공정'을 이끌고 있다.

윤 위원은 중국의 동북공정은 "중국 내부의 다원적, 분산적, 원심적 사회 변화와 맞물려 표출되는 민족적·지역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중국적 해법"이라고 분석했다. 개방개혁 이후 중국에서는 동남 연해 지역과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내륙 지역 간의 빈부격차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위구르, 티베트 등 일부 소수민족이 분리독립을 추진하는 등 민족적 위화감이 커지고 있다. 특히 한반도와 관련, 한국의 '재외동포특별법' 제정과 재중동포의 국적회복운동, 탈북자 문제 등이 중국 동북지역 사회 안정을 해칠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는 것.

윤 위원은 "중국의 동북공정은 '현재'의 필요에 의해 역사를 재단하는 '이고위금(以古爲今)'의 전형적 사례이며 '현대판 화이관(華夷觀)'이 표출된 삐뚤어진 역사인식"이라고 비판했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周恩來 "발해는 한국史"/설훈 前의원, 문서입수 공개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사진) 전 중국총리가 한민족이 고대부터 중국 동북부에서 거주해왔으며 발해를 한국사라고 지적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또 이를 왜곡하는 중국 역사학자들의 관점을 '대국 쇼비니즘(국수주의)'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연수중인 설훈 전 민주당의원이 입수해 13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한 '주은래 총리의 중국―조선 관계 대화'라는 문서에서 밝혀졌다.

문서에 따르면 저우언라이 총리는 1963년 6월28일 중국을 42일간 방문한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 20여명과 만나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그다지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투먼(圖們)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며 "랴오허(遼河), 쑹화(松花)강, 투먼강 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고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징보(鏡泊)호 부근은 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며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 민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중국 역사학자들은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기도 했는데 이것은 역사왜곡"이라며 "이는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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