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12일 김대중 전대통령을 만나 유신체제에 대해 전격 사과한 것은 나름의 정치적 의도와 함의를 깔고 있다는 분석이다.박 대표는 우선 유신체제의 상징적 피해자 중 한 사람인 김 전대통령을 택함으로써 사과의 효과를 극대화하려 한 것 같다. 아울러 조만간 유신의 과오에 대한 대(對) 국민사과가 있을 것임을 시사한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한 측근은 "유신에 대한 사과는 박 대표에게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라며 "사과는 원래 처음이 어려운 데 큰 부담을 덜었다"고 말해 이런 시각을 뒷받침했다. 박 대표가 정수장학회 논란에 대해 "나에게 맡겨달라"며 이사장직 사퇴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지적들이다.
박 대표는 김 전대통령에 대한 사과를 통해 반(反) 유신, 반 한나라당 정서가 특히 강한 호남과의 화해를 동시에 모색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호남 사람들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게 적은 데 앞으로 많이 도와주시길 바란다"고 김 전대통령에게 요청하는 등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결국 박 대표의 전직 대통령 순방은 이날 김 전대통령에 대한 사과에 진짜 목적이 있었던 셈이다.
두 사람의 공식적인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30여분간의 만남은 시종 화기애애했다. 박 대표의 준비된 깍듯함과 사과가 호의적 분위기를 만들었다.
김 전대통령도 박 대표가 '듣고 싶어 했던'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김 전대통령은 "내가 한 정치 중 가장 성공하지 못한 게 동서화합"이라며 "박 대표가 동서화합의 제일 적임자"라고 격려했다. 이와 관련, 박 대표는 27,28일 예정돼 있는 의원 연찬회를 호남에서 열도록 했다. 박 대표는 "이벤트나 법이 아니라 지속적 관심과 노력으로 호남의 지지를 얻도록 해보겠다"며 강한 의욕을 보였다.
김 전대통령은 또 박 대표에게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다시 만날 것을 권유하는 등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적극적 역할을 해줄 것을 주문했다. 박 대표측은 "남북문제에 관한한 국외자였던 과거 야당지도자와 달리 박 대표는 당사자"라며 "김 전 대통령이 이런 박 대표의 강점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고 주장했다.
/이동국기자 east@hk.co.kr
■ 정치권 반응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민주당 등은 12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유신 시절 피해를 사과한 데 대해 "개인차원의 사과일 뿐"이라고 의미를 축소하면서 "진정한 사과는 국민과 역사 앞에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우리당 장영달 의원은 "DJ에 대한 사죄는 당연하지만 개인 차원일 뿐"이라며 "정치 일선에서 떠나 자숙하는 게 사람된 도리"라고 말했고, 유기홍 의원은 "전직 대통령을 연이어 만나는 과정에서 끼워 맞추기 식으로 나온 사과라 진정성에 의심이 간다"고 평가절하했다.
문학진 의원은 "퍼스트레이디로서 유신의 한복판에 있었던 자신의 과오부터 사죄해야 한다"며 유신 시대 박 대표의 역할에 초점을 맞췄고, 우원식 의원은 "진심으로 사과할 마음이 있다면 권위주의 시대의 획일성에 기초한 국가 정체성 논란을 더 이상 부추겨서는 안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당은 논평에서 "식민시절의 잘못에 대해 일본이 가끔 하는 사과가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말로 박 대표의 정치적 의도를 꼬집기도 했다.
민노당의 평가도 비슷했다. YH사건의 당사자인 최순영 의원은 "역사와 국민 앞에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 한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고 폄하한 뒤 "박 대표가 진정한 정치 지도자가 되려면 유신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고 홀로서기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논평을 통해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헌신했던 분들에게 진정으로 속죄하려면 역사와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전형 대변인은 "유신시절의 고문 후유증으로 지금껏 치료를 받고 있는 한화갑 대표는 박 대표의 사과 소식을 듣고 만감이 교차하는 듯 아무 말 없이 허공만 응시했다"고 전했다.
한나라당 비주류 의원들은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이재오 의원은 "DJ개인에 대한 사과일 뿐이어서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박계동 의원측은 "그런 식으로 사과가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반면 홍준표 의원은 "DJ 개인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시대에 대한 사과이며 잘한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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