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아이들에게 물을 아껴쓰라는 말을 할 때마다 슬며시 떠오르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한 아이가 있다. 몇 년 전 ‘물 아껴쓰기 글짓기대회’에 심사를 나갔다가 만난 학생이었다.전국에서 수천 편의 원고가 응모되어도 이야기는 몇가지 패턴 속에 움직인다. 자신들이 배우는 환경교재 속에도 나오는 한 작은 물방울의 순환을 의인화하여 그린 ‘나는 물입니다’를 모방하여 쓴 원고가 가장 많고, 구체적으로 물을 아끼는 방법에 들어가서는 화장실을 사용할 때마다 매번 물을내리지 말고 두 번에 한번쯤 내리자는 다소 엽기적인 제안이 가장 많았다.
그 중에서 내가 본 가장 엽기적인 제안은 ‘화장실 버전’을 그대로 부엌에 옮겨간 어느 중학생의 글이었다. 설거지를 밥 먹을 때마다 하지 말고,저녁에 모아서 한꺼번에 하면 많은 양의 물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심사위원들 모두 돌려가며 보고 웃었는데,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물을 아끼기 위해 우리 모두 일회용 그릇을 씁시다 라고 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지 뭐.”
목적과 취지가 바뀌면 누구나 저렇게 엉뚱하고도 용감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순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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