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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워치]천박한 정체성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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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워치]천박한 정체성 논란

입력
2004.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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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프린스턴 대의 역사학자 해럴드 제임스는 국가의 정체성을 오랜 역사에 걸쳐 다양한 벽돌로 쌓은 건축물에 비유했다. 따라서 어느 시점에 배타적 사회 정치 경제 이념을 토대로 정체성을 규정하는 시도는 역사의 건축물에 정치적 폭약을 설치하는 것이라고 했다. 편협한 이데올로기에 집착한 정체성 규정은 역사 속에 이어져 온 국가 통합 자체를 무너뜨린다는 지적이다.18세기이래 형성된 독일 민족의 정체성을 탐구한 그는 저서 '독일의 정체성'(A German Identity) 제목에 정관사 The 아닌 부정관사 A를 썼다. 200년에 걸친 정체성 추구 및 형성 과정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제환경 등 다각적 틀로 분석하면서도, 유일한 정답은 없다는 전제를 스스로 따른 것이다. 정체성 탐구는 먼저 역사의 필연성을 이해하고, 그 역사의 굴곡과 오류에서 교훈을 얻는 작업이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의 말은 우리사회 정체성 논란의 본질을 꿰뚫은 경고로 들린다. 이 땅의 정치 사회세력은 저마다 받드는 이념을 기준으로 우리의 정체성은 바로 이 것이라고 못박는다. 그 틀에 맞지 않는 상대방 이념과 행적은 정체성을 훼손하는 악덕, 척결대상으로 매도한다. 솔직히 이런 천박한 정체성 논란은 도무지 돼먹지 못했다. 다만 정당한 참견조차 편들기로 여기는 야만적 세태를 고려, 연고 없는 미국 학자의 역사관을 앞세웠을 뿐이다.

국가 정체성의 교과서적 풀이도 다르지 않다. 국가 존속에 필요한 기본적 요소, 국민적 단합의 밑거름, 국가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 집단과 개인의 심정적 유대 등이 그 개념이자 본질적 요소다. 이런 풀이는 우리사회는 역사적 문화적 일체감이 정체성 형성에 유리한 바탕인 동시에 전통적 연고주의 와 지역이기주의, 일제 통치와 미 군정에 따른 자치역량 부족, 권위주의적 정치문화, 1980년 대까지의 성장위주 경제정책과 분배와 복지 소홀 등이 다원적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보면 지금의 정체성 논란은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겸허함은 찾아볼 수 없다. 보수와 진보를 가림 없이 현실적 이해에 따라 역사를 독단적으로 해석하고, 정체성 추구를 독점하려는 무모한 아집만 두드러진다. 한나라당과 보수세력이 극단적 반공 이데올로기 등 낡고 편협한 정치 경제 사회 이념에 집착, 정부 정책이 국가 정체성을 위협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과장된 퇴행이다. 헌법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리를 비판근거로 삼지만, 교과서적 안목에도 미치지 못한다. 다원적 민주발전을 위한 정책의 현실 적합성은 따져야 하지만, 정부의 본질적 정체성을 시비하는 것은 굴곡 많은 역사의 질곡을 짊어지고 가려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 정체성 확립 시도도 역사의 필연성은 아랑곳없이 자의적 잣대로 재단한 벽돌로 새로 역사를 쌓으려는 무모한 시도다. 2차 대전후 모든 신생국이 경제발전을 민족국가건설과 정체성 확립의 최고 덕목으로 삼은 사실을 외면한 채, 민주발전을 저해한 오류만 비난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시대와 국제 여건 등을 무시한 강퍅한 역사 인식이 민족 암흑기의 친일 행적을 온통 파헤치겠다고 외치는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스스로 일관되지 못한 과거사 뒤지기는 역사의 벽에 부딪쳐 부메랑이 되기 십상이다. 박근혜 대표를 압박한 정수장학회 논란에서 쿠데타 정부가 강제헌납 받은 김지태 씨 재산의 기반은 일제 수탈기관 동양척식회사의 토지를 불하 받은 것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악연으로 얽힌 박정희와 김지태 두 사람의 행적을 뒤쫓다 보면, 땅 주인 찾아주기에 열심인 듯한 권력 주변과 진보 언론조차 자가당착과 정체성 혼란에 빠질 수 있다. 해럴드 제임스는 사회적 공생의 틀 안에서 다양한 이념과 국가발전 비전의 타협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올바른 자세라고 말했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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