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8월9일 문교부(지금의 교육인적자원부)가 각급 학교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시행토록 시달했다. 이 날부터 전국의 학교와 관공서에서는 기존의 애국가 제창이나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외에 국기에 대한 맹세가 국민의례의 새로운 항목으로 추가됐다. 그보다 네 해 전 충청남도 교육위에서 문안을 만들어내 보급하기 시작했다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유신시대와 5공화국 군사정권 시절을 거쳐 정치적 민주화가 사뭇 진전된 지금까지도 시행되고 있다.그 법적 근거는 5공 시절인 1984년 2월21일 대통령령 제11361호로 처음 공포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이다. 이 규정 제3조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에는 다음의 맹세문을 낭송하여야 한다. 다만, 국기에 대한 경례 중 애국가를 주악하는 경우에는 이를 낭송하지 아니한다"고 전제한 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고 맹세의 내용을 밝혀놓고 있다.
국민국가가 존속하는 한 애국심은 늘 커다란 가치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애국심을 꼭 남들 앞에서 정형화한 문구로 증명해 보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보수적 정치인들의 낮은 군 복무율에서 보듯, 입만 열면 애국심을 되뇌는 사람이 반드시 국민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인지는 확실치 않다. '악마의 사전'의 저자 앰브로스 비어스는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피난처"라는 새뮤얼 존슨의 경구를 한 번 더 비틀어 그것이 '악당의 첫번째 피난처'라고 비꼰 바 있다. 무엇보다도, 조국이나 민족처럼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불가능하다. 우리들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사람, 풀꽃, 갈매기, 가을비, 붉은 포도주, 디스플러스 담배, 열무냉면 같은 구체적 대상들뿐이다.
고종석/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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