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소설선집)/벚꽃동산(희곡선집)안톤 체호프 지음 오종우 옮김
열린책들 발행 각권 7,500원
안톤 체호프(1860~1904)는 지병인 결핵으로 100년 전 7월16일 타계했다. 숨이 멎기 직전, 의사의 허락 하에 아내와 마지막 샴페인을 나누며 그가 남긴 말. “샴페인은 정말 오랜만이군.”
만일 생명시계가 있어 그에게 남은 시간을 알려줬더라도, 유언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장중하고 심오한 말이나 삶의 비의를 담은 듯한 열반송은, 우리가 아는 그에게는 도무지 어울릴 듯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유언 같지 않은 유언에 담긴 문학적 비의를 제대로 깨닫게 된 것도, 그래서 그의 문학세계와 유언의 어울림에 수긍하게 된 것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일. 그는 지난 세기말이 걸쳐진 혼돈의 44년을 사는 동안 500여 편의 단편과 16편의 희곡을 남겼고, 일관되게 ‘하찮은 사람들의 같잖은 일상’을 푸근한 웃음으로 감싸 안았다.
몇 없는 국내 체호프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오종우(성균관대 러시아어문학과) 교수가 그의 서거 100주기를 맞아 체호프 소설ㆍ희곡 선집을 번역 출간됐다. 소설집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에 든 17편 중 11편과, 희곡집 ‘벚꽃동산’의 ‘어쩔 수 없는 비극배우’는 국내에 초역된 작품들이다.
‘굽은 거울’은 체호프가 숨지기 1년 전, 직접 선별해 만든 선집의 맨 첫 작품. 주인공에게는 증조할머니가 애지중지하던 유품으로, 피사체를 비틀고 일그러뜨려 비춰주는 묘한 거울이 있다.
그런데 그 변형된 거울의 상으로 보니 못난 아내의 얼굴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하여, 증조할머니가 그랬듯 아내도 온 종일 거울을 끼고 산다. 더 없는 행복감에 젖어…. 착각이 낳는 행복은 우스꽝스럽지만, 어쩌면 그게 우리의 미워할 수 없는 일상이다.
체호프는 작품에 거창한 메시지를 담으려던 당대의 작가들과 교육적 텍스트처럼 읽으려던 독자들의 기호를 못마땅해 했다(오종우 교수). 표제작인 ‘개를…’에 나오는 여주인공 이름은 ‘안나’다.
삶이 권태롭던 안나는 휴양지 얄타에서 한 남자와 바람이 난다. 둘은 얼마 후 각자의 가정과 직장으로 돌아오지만 서로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일상과 소통하지 못한다. 얼마간의 불안과 얼마간의 죄의식을 느끼지만, 이중생활을 청산할 마음은 없다.
체호프는 당대 러시아 문학의 대 선배였던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리나’에서 불륜의 안나를 죽게 만든 것에 반감을 갖고 동명의 주인공을 등장시켰다고 한다. 그는 현실이 결코 도덕적이지도 않고, 추론을 통해 구축된 개념의 세계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희망이며 진리도 있는 그대로의 삶과 세상을 냉정히 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위적 설정으로 도덕을 강요하는 것은 윤리철학에게나 맡겨 두자는 그의 문학관이 있어 20세기 현대예술이 철학의 자장에서 벗어나 자립의 터전을 닦을 수 있었고, 그가 남긴 작품들로 현대 단편소설의 양식과 주제의 변주가 가능했다는 평가는 그래서 결코 과장이 아니다.
작가 생전에 막심 고르키는 자신의 새 작품을 들고 와 일일이 자문을 구했고, 작가의 사후에 나딘 고디머는 “그가 없었다면 우리들 가운데 누가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라며 자학하듯 그를 높였다고 한다.
1980년대 미국 단편문학의 거장으로 체호프 최후의 날의 소재로 ‘그림자’라는 단편을 썼던 레이먼드 카버는 “체호프는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작가”라며 자신의 영광을 그에게 돌렸다.
그의 작품은 참 평이하고 대중적이다. 읽고 느끼기에 결코 어렵지도 부담스럽지도 않다. 그러니 그 작품들을 연구 텍스트의 중심에 놓고 무려 15년을 읽어 온 오 교수의 말은 아무래도 거짓말처럼 들린다.
“번역하고 교정지를 읽다 보니 ‘어! 이러네’ 싶더니, 책이 출간돼 다시 읽다 보니 ‘어! 이런 것도 있네’ 싶은 대목이 튀어나와요.” 다시 읽어볼 일이다.
/최윤필기자 walolen@hk.co.kr
■체호프 제대로 보기-학술대회·연극 줄줄이
체호프 서거 100주기를 맞아 국내 학술ㆍ연극계도 그를 ‘다시 보고, 제대로 보자’는 움직임으로 부산하다. 내달 초에는 한국노어노문학회, 10월 중순에는 한국러시아문학회가 각각 대규모 국제학술대회를 서울에서 연다.
러시아 유학1세대 연극연출가 전훈(39)씨는 지난 4월과 7월 ‘벚꽃동산’과 ‘바냐 아저씨’를 각각 애플씨어터, 극립극장과 함께 공연한 데 이어, 오는 9월에는 연말에는 ‘세 자매’를 정동극장에서 공연하는 등 체호프의 4대 장막극 모두를 무대에 올릴 참으로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극단 지구연극연구소도 내달 ‘바냐 아저씨’를 공연하고, 국내 일정이 끝나는 대로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안톤 체호프 도쿄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 참가할 계획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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