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외교부 홈페이지의 우리나라의 해방 전 역사를 아예 모두 삭제하는 조치를 취해 한중간 고구려사 왜곡 논란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중국측 입장에선 한발 물러섰다는 제스처이지만 갈등은 수그러 들기는커녕 도리어 확대될 소지가 있다. 소나기를 잠시 피해보려는 미봉책임이 분명한데다, 한발 더 나아가서는 우리측의 고구려사 원상회복 요구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의사를 내비친 셈이기 때문이다.
이번 조치는 고구려사를 둘러싼 양국갈등의 '중국식' 절충이다. 중국측은 애초 자신들의 국경 내 역사를 모두 중국역사로 만들기 위한 '동북공정' 프로그램에 따라 지난 4월 외교부 홈페이지의 고구려사 부분을 의도적으로 삭제했다. 지난달 뒤늦게 이를 발견한 우리 정부는 외교경로를 통해 강력항의하며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특히 우리 정부는 탈북자 문제 등에서 보여온 '조용한 외교'의 원칙을 버리고 이례적으로 중국을 상대로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다. 이에 따라 중국이 문제가 된 홈페이지의 한국 고대사를 삭제하는 봉합책을 제시한 것이다.
중국측은 이날 홈페이지상의 일본 역사에도 손을 댔다. 일본의 대표적 식민사관으로 우리 정부가 시정을 요구했던 '임나일본부설'을 삭제하고 우리 역사와 마찬가지로 2차대전 이후부터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정부를 달래려는 방편에 불과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중국측 조치를 받아 들고 내심 난감해 하고 있다. 애매한 절충안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실망과 유감을 표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고구려사에 대해 작심하고 나선 중국이 원상회복시킬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웃지도 울지도 못할 상황인 셈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중국의 조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언론에서 알아서 해석해 달라"며 언급을 피했다.
중국 정부는 홈페이지 문제를 봉합한 뒤 한중간 학술창구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중국측이 외교적으로 문제를 봉합한 채 실제로는 동북공정을 착착 진행시킬 의도가 명백해 우리정부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날 방중한 박준우 외교부 아태국장도 '고구려사는 우리 민족사의 불가분의 일부로서 양보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강경한 입장을 중국측에 재확인시킬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이 역사왜곡 문제는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 외에 대학교재 등 출판물에도 퍼져나가고 있다. 지린(吉林)성 등 지방정부도 고구려사를 중국역사의 일부로 홍보하면서 갈등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중국은 출판물 왜곡 등에 대해선 일절 반응도 하지 않고있다.
/김정곤기자 kimjk@hk.co.kr
■"답안지 고치랬더니 찢어버린 격"/학계·시민단체 반응
학계와 시민단체는 중국 외교부가 한국 정부수립 이전 역사를 홈페이지에서 완전히 삭제한 데 대해 "우리의 요구를 수용하기는커녕 도리어 후퇴시킨 조치"라면서 분노를 표시했다.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윤창현(명지대 교수) 사무총장은 "답안지를 고치라고 했더니 찢어버린 격"이라며 "만주-북한-한국으로 연결되는 한민족벨트 형성을 차단하기 위한 중국의 의도가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중국이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오만한 자세로 제국주의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고 덧붙였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최광식 교수는 "이제는 중국이 고구려뿐만 아니라 조선과 고려, 백제, 신라 등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완전히 부정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 아니냐"며 "중국도 정부 차원에서 나섰기 때문에 우리도 정부가 앞장 서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여호규 교수는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중국 동북지방에서 불기 시작한 열풍을 잠재우기 위한 의도로 시작된 '동북공정' 프로젝트는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가속화할 전망"이라며 "범정부 차원에서 논리와 정책을 연구해 대응해나가야 때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구려연구재단 등 학계에서는 최근 중국 사회과학원측에 고구려사 관련 토론회를 제안한 상태로, 향후 학계 차원의 항의활동도 한층 더 강화할 계획이다. 최 교수는 "논문 발표와 토론 등을 통해 중국 학자들의 고구려사 왜곡을 반박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시민단체들은 중국정부가 외교적으로는 갈등을 봉합하면서 문화적으로는 역사적 침탈행위를 강화하려는 이중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중국이 학술적으로는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는 조치들을 더 가속화해나갈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역사 바로알기 시민연대 이성민 대표는 "이제는 우리의 역사적 뿌리가 없어지는 상태에 직면할지 모르겠다"며 "정부가 지금까지 소극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커지고 있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중국측은 홈페이지의 해방 전 역사를 삭제한 뒤에도 갖가지 유화적 제스처를 우리측에 제시할 것"이라면서 "그러나 이 같은 조치들은 모두 역사왜곡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한 작업이기 때문에 결코 정부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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