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치권에서 과거사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가까이 유신체제에서 멀리는 친일문제에 이르기까지 과거 평가를 둘러싼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다. 이 와중에 비전향 장기수와 국가정체성에 대한 논란까지 더해져 그 양상이 간단하지 않다.일각에선 논란에 담겨진 정치적 의도에 의혹의 시선을 보낸다. 더불어 민생이 이렇게 어려운데 과거사에 매달리는 것에 적잖은 우려를 표명한다. 일견 옳은 지적이다. 한번 흘러간 과거는 과거일 따름이다. 새삼 끄집어내 털어낸다고 해서 바꿔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광속도(光速度)로 변해가는 세계화와 정보화의 시대적 흐름에 비춰볼 때 많은 부분 낡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과거는 지나간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과거는 끊임없이 새롭게 발견되고 재해석되며, 무엇보다 현재의 의미를 구성한다. 1980년 5월 민주화운동은 적절한 사례다. 그것은 무장폭도에 의한 반란이 아니라 군사독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이며, 이런 재평가는 우리 민주화 과정에서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 왔다. 바로 이 점에서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인식, 즉 '역사 바로 세우기'는 우리가 놓여 있는 현재에 대한 탐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정치권이 온통 과거사에 얽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대한 평가를 외면할 필요까지는 없다. 건국, 산업화, 민주화로 이어지는 현대사를 돌이켜볼 때 과거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유보된 바 적지 않으며, 정치권이 더 늦기 전에 이를 정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가'의 과거에 대한 탐구는 '우리는 누구인가'의 현재에 대한 질문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의 미래에 대한 모색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문제는 '역사 바로 세우기'에 내재된 정치적 편향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다.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과거 인식이라 하더라도 정치적 해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과거 없이 현재가 존재할 수 없듯이 현재의 정치세력 또한 과거의 정치세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손익계산이 과거사에 대한 논란을 증폭시키는 이유이자 '과거의 정치'가 다름 아닌 '현재의 정치'인 이유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탈정치적 관점에서 과거사를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이에 대한 과도한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정치적 의도가 과잉화될 때 과거사에 대한 평가는 정략적 싸움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 친일문제와 유신시대를 포함해서 밝힐 것은 더욱 명백히 밝혀야 한다. 반성할 것을 겸허히 반성할 때 과거는 비로소 정리될 수 있다. 다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련 학계의 전문적인 연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정치권이 입법화할 것은 입법화하되 학계의 해석에 맞길 것은 학계에 맞길 필요가 있다. 둘째, 시민사회의 여론을 존중해야 한다. 비전향 장기수 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과거의 상처들 또한 적지 않다. 역사 해석은 어느 하나가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정치권, 학계, 시민사회의 생산적인 분업과 토론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일찍이 시인 김수영은 '거대한 뿌리'라는 작품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김수영 선생이 모든 역사를 옹호한 것은 아니다. 그릇된 과거는 고쳐야 하며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 과거는 현재를 이루는 거대한 뿌리다. 뿌리가 제대로 서 있지 않다면 나무는 결코 하늘 높이 자랄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