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란 '가우불가구(可遇不可求)'란 말과 같이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된다. 한국일보와 나의 인연이 바로 이런 범주에 속한다 하겠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난 중국 사람이다.내가 1973년 한국에서 경북대를 졸업한 후 대만에 건너와 중국문화대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일이다. 한국에서 줄곧 애독하던 한국일보를 대학원 기숙사에서 계속 구독할 수 있을지 궁금하였다. 다행히 이곳 석·박사 과정에 재학하던 한국인 선배 유학생을 통해 한국일보 대만지국의 전화를 받아 어렵지 않게 구독신청을 할 수 있었다. 지국에서 대만에 유학 온 한국 학생들에게 상사(商社) 주재원들보다 구독료를 저렴하게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내가 한국말을 잘 하는 덕분에 '한국 유학생' 대우를 받았던 것 같다. 사실 그 당시 대만 물가와 대학생들의 생활비에 비추어 보면 구독료는 학생들의 반 달치 식사비용에 버금가는 액수였다.
나는 때로는 기숙사에서 라면을 끓여 먹던 가난한 유학파에 속했지만, 다행히 그 때는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양국의 정치·외교 관계가 가장 돈독했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는 한국의 고위층은 물론 일반 공무원들도 '대만 견학'이 매우 빈번했다. 견학 분야도 다양했다. 공무원 제도, 농촌 개발, 중소기업, 교육제도 심지어 조선, 제철 분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양국의 밀접한 관계로 한국어와 중국어 통역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였다.
경북 고령에서 출생한 나로서는 천운(天運)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학생 신분인데도 불구하고 중화민국 각 부처에 자주 불려가 통역을 맡았다. 그 당시 대만을 방문한 한국의 각계각층 유명인사 이름을 줄줄 욀 정도로 나는 통역 일을 자주 맡아, 한국일보 구독료 뿐만 아니라 생활비도 벌 수 있었다.
당시 내가 한국일보에서 가장 관심 있게 봤던 것은 대만 관련 기사였다. 그때는 한국 신문들이 대만 기사를 많이 취급할 무렵이다. 76년 말 한국일보 편집국 조순환 부국장이 대만을 방문한 후 쓴 견문기를 내가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 77년 1월2일 대만 연합보(聯合報) 2면에 크게 실렸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당시 한국일보 박실 기자의 대만 취재기사를 번역하여 78년 3월30일 대만 중앙일보(中央日報)에 내기도 했다.
이처럼 대만 유명 일간지에 내가 번역한 글이 소개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한국일보 덕분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한국일보와 나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정일화 기자가 대만 현지 취재할 때 나와 둘이서 피자를 먹으며 인터뷰한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정 기자와의 요청으로 88년 1월1일 나의 졸작(拙作) 한 편이 한국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정 기자의 도움으로 나의 '한국 정치론' 중국어 번역 출판 소식이 한국일보에 소개되기도 했다.
한국일보가 50주년을 맞았다. 공자님 말씀을 빌리자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이다. 멀리 대만에서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한국일보와 나의 인연도 어언 30여 년이 넘었다. 한국일보는 '한국'이란 국명을 가진 신문이다. 그래서 한국을 대표하는 신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진·선·미를 상징하는 신문이 되어주기를 기원한다. 한국일보와 나의 인연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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