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배우 한 명이 있습니다. 그가 읊조린 대사 중 인상 깊은 구절을 한 번 인용하겠습니다.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가운데 한번 떠난 장수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네”혹시 ‘서안화차’(한태숙 연출)를 보셨다면 묵직한 저음에 실려 객석을 휘돌던 이 대사를 떠올리실 수 있을 겁니다. 소극장치고는 천장이 높고 객석이 긴 정미소극장 안이 묘한 기운으로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올 봄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른 ‘환’(양정웅 연출)에서 술장군 역을 맡은 이도 그였습니다. 저 깊은 바닥에서 끌어올린 듯한 서늘하면서도 무게 있는 목소리.
그리고 또 한 명의 배우가 있습니다. 김상열이 이끄는 극단 신시에서 10년 넘게, 동료들이 주연으로 커 가는 동안 무대 뒤편에서 ‘연기가 안 되어’ 소품만 만들던 배우입니다. “연극만 시켜준다면 뭐든지 했다”는 그는 몇 년째 밤새 ‘풀팅’(벽에 연극 포스터 붙이는 일)을 하느라 잠도 자지 못했습니다.
즉심에 넘어 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누워 계시고, 어머니도 소아마비로 고생을 하셨습니다. 게다가 2남 2녀의 장남인지라 포장마차부터 백화점 영업, 악기공장, 청소 등 닥치는 대로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연극의 꿈을 포기할 순 없었습니다. 신시 극단을 나온 뒤 16개 극단을 돌아다니며 “일을 달라”고 했지만 “나이가 많다” “배우로서 개성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두 배우는 같은 사람입니다. 최일화(45). 그가 ‘삼류배우’(연출 김순영) 재공연무대(29일까지 대학로 발렌타인극장)에 올랐습니다. 데뷔 20년만의 첫 주연입니다. 어떻게 20년을 버텨왔을까.
그 동안의 설움과 마음 고생은 본인 아니면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꿈을 위해 1,000원으로 복권을 사는 이도 있습니다. 꿈을 위해 20년간 어둡고 차가운 계단을 차근차근 오르는 이도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꿈을 꾸고 계십니까.
이종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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