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30일 의문사진상규명위의 활동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던진 메시지는 친일 행위 및 유신시대 인권 탄압 등 과거사에 대한 포괄적 진실 규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동안 논란이 빚어졌던 의문사위의 활동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지 않고 거꾸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의문사위에 힘을 실어준 것도 주목할 만하다.
노 대통령은 친일 행위 규명을 위해 제헌국회에 설치됐던 반민특위가 제 역할을 못하고 해체된 것이 잘못됐다는 점을 거론하면서 과거사 규명의 당위성을 어느 때보다 강조했다.
그는 지난 역사에서 쟁점이 됐던 것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국가적 사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의문사 진상 규명 작업이 동학혁명, 친일 행위, 거창 양민학살사건, 제주 4·3사건, 5·18 광주민중항쟁, 삼청교육 피해, KAL기 폭파사건 등 국회에서 거론되는 10여 가지의 의혹 사건들까지 묶어서 함께 다뤄져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국민의 정부' 이후로 정치 지도자들이 "과거사 논쟁을 하기 보다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주장을 많이 했던 점을 감안하면, 노 대통령의 과거사 규명 작업에 대해서는 역사적 의미 뿐 아니라 정치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의 언급은 참여정부의 정체성 문제를 제기하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등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특히 여권에서는 박 대표에 대해 '유신시대 독재자의 딸'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상황이다. 청와대 김종민 대변인은 "특별한 이유로 유신시대를 거론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으나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유신시대 언급에 반격을 가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의문사위가 비전향 장기수의 민주화 운동 기여를 인정한 것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잘 했다"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의문사위를 공격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며 의문사위를 두둔했다.
그는 " 의문사위 활동에 대해 내가 부정적으로 말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는데 내가 부정적 말씀을 드릴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의문사위는 조직상 대통령 소속이지만 완전히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고 조사관 임명도 독립적으로 한다"면서 의문사위 활동과 대통령 의중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취지로 선을 그었다. 이에 대해 야권 일부에서는 "노 대통령이 비전향 장기수의 민주화 기여를 인정한 것이냐"고 공격하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말 활동이 종료된 2기 의문사위를 이을 3기 의문사위 출범 문제에 대해서는 "국회에서 방향을 잡아줄 것으로 기대한다"면서 일단 국회에 공을 넘겼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 의문사委 보고내용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30일 노무현 대통령에게 1년 간의 활동을 마무리하는 보고를 하고 비전시에 군사법원 폐지 등을 건의했다.
의문사위는 이날 보고에서 "군 의문사 문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군사법원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문제가 악화됐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 비전시에는 군사법원을 폐지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또 "과거청산을 위한 진상규명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밝혀 3기 의문사위 출범이 필요하다는 뜻도 내비쳤다.
의문사위는 또 "조사권한이 미약하고 조사기간과 조사인력이 부족해 제약이 있었다"며 "국가정보원 기무사 등의 비협조로 충분한 진상규명이 힘들었다"고 보고, 의문사위의 권한강화 필요성을 제기했다.
의문사위는 이밖에 집단학살 및 고문 등 반인권적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와 가해자에 대한 처벌 강화 전문성을 갖춘 사인확인기관 설립 등을 권고했다.
이날로 모든 공식활동을 마친 2기 의문사위는 2003년 7월1일 출범 이후 1기 의문사위 진상규명 불능 사건 30건, 1기 기각 사건 가운데 진정인의 이의제기로 재조사에 착수한 14건 등 총 44건의 의문사를 다뤄 비전향장기수 출신인 최석기 박융서 손윤규 사건 등 총 11건(25%)을 '민주화운동 중 위법적 공권력에 의한 사망'으로 인정했고 장준하 사건 등 24건(55%)에 대해서는 진상규명 불능, 이재근 사건 등 7건에 대해서는 기각, 나머지 2건은 각하 결정을 내렸다.
정연관 사건에서는 1987년 12월 군부재자투표 당시 여당 지지 강요 사실을,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강제징집 사건에서는 대학 당국의 가담 사실을 규명하는 성과를 올렸다.
/최영윤기자 daln6p@hk.co.kr
■한 "간첩·빨치산에 면죄부"
한나라당은 30일 노무현 대통령이 의문사위 활동에 대해 "존중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자 "간첩과 빨치산을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한다는 것이냐"며 대대적 공세에 나섰다. 한나라당은 또 "의문사위 공격은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라는 노 대통령의 말을 "터무니 없는 궤변으로 여론을 호도하려는 특유의 오기 선동 정치"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국가정체성 공방 원인 제공을 했던 의문사위를 노 대통령이 감싸 안음으로써 확전이 불가피해졌다는 게 한나라당의 분위기다. 한나라당은 "관련 상임위를 소집, 한상범 위원장 등 의문사위 관계자를 불러 진상파악에 나서는 한편 청문회와 국정조사도 검토하겠다"며 칼을 갈았다.
김덕룡 원내대표는 이날 오후 기자간담회를 자청, 노 대통령의 발언을 "실언이고 망언"이라고 규정하며 격하게 성토했다. 그는 "엄연한 직속 기구인 의문사위를 극구 독립기구인양 발언하는 것은 책임회피"라며 "직속 기구가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을 위협하는 월권과 일탈 행위를 자행했으면 그 최고 책임자로서 관련자를 엄중 문책하고 국민 앞에 사과해야 옳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문사위가 벌인 일련의 국기 문란 행위가 조직적 기획 하에 이뤄진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많았는데 노 대통령은 이런 의혹을 해소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증폭시켰다"고 공박했다.
이한구 정책위의장도 "의문사위가 대통령의 직속기구인 만큼 대통령이 나서 자신이 잘못했다든가, 위원을 잘못 임명했다든가 하는 내용으로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며 "의문사위를 공격하는 것을 자기 공격으로 인식한다면서 정작 자기와 관계없는 독립기관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자기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임태희 대변인은 논평에서 "대통령의 발언이 간첩과 빨치산 활동에 대한 정치적 면죄부를 선언하고 국가를 전복하려 했던 세력을 비호한 것이 아닌 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전날 '유신-미래 발언'에 대해서도 "과거로 회귀하려는 사람이야 말로 노 대통령"이라고 반박하며 "내편, 네편 식의 국민 가르기를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김덕룡 원내대표는 주요당직자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입만 열면 이분법적 편가르기식 선동이고 막말"이라면서 "이런 대통령 밑에서 국민 노릇하기 피곤하다"고 비판했다.
김형오 사무총장은 "유신이냐, 미래냐의 길은 이미 갈렸으며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며 유신으로 회귀하려는 것이야말로 노 대통령"이라면서 "독선적이고 독재적인 사고야말로 유신적인 사고"라고 지적했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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