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 버지니아 울프 지음박희진 옮김 / 솔 발행 1만3,000원
1931년 버지니아 울프의 만년작 ‘파도(The Waves)’가 출간되자 NYT가 ‘등장인물 묘사가 압권’이라는 요지의 서평을 실었던가 보다. 이 기사를 두고 울프는 일기에서 ‘웃긴다.
그 책의 인물들은 하나의 꽃송이에 달린 낱장의 꽃잎 같은 존재인데…’라고 적었다. 하지만 NYT의 서평도 옳았다. 작가가 의도한 한 인간의 성격적 편린과 실존적 분화들이 독립적 인격체로 읽히기에 충분할 만큼 보편적이고 변별적이기 때문이다.
1994년 한국 울프학회가 태동하고 2002년 정식 출범했지만, 지금까지 국내 영문학계와 울프 전공자들은 ‘파도’ 앞에 위축돼왔다.
울프 문학 연구자라면 열이면 열 그의 대표작이자 가장 빛나는 예술적 성취로 꼽아온 작품. 이웃 일본만 해도 33년에 완역했고 99년 재번역한 이 작품 의 번역판이 우리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책이 출간 73년 만인 이제야 서울대 박희진(영문학과) 명예교수에 의해 번역됐다.
‘파도’는 울프의 다른 책보다 조금 더 난해하다. 출판 편집자조차 교정지를 읽고는 고개를 갸웃대다가 세 번 읽고서야 감탄했단다. 울프 문학의 대가로 꼽히는 프랑스의 평론가 장 기게의 ‘사람을 사귀듯 두고 두고 읽어야 한다’는 말도 같은 의미다.
‘파도’에는 여자 셋과 남자 셋이 나온다. 세 여자는 가부장사회의 성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들. 타고난 능력과 야망을 결혼생활에 묻고 살지만 채우지 못한 욕망에 간간히 분노하거나, 창녀가 된다.
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채 정신적 병을 앓다가 자살한다. 세 남자는 다르다. 삶의 근원적 의미를 추구하면서 사회적 모순에 대해 이해심을 지닌 이가 있고, 촌스러운 억양 콤플렉스를 지닌 채 상류사회 편입을 갈구하는 욕망의 화신도 있다. 인간적 성취나 자질은 뒤떨어지지만 남자로 태어난 덕에 시인이 된 이도 있다.
그리고 열외의 인물이자, 이상적 인간상을 구현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또 한 사람의 등장인물이 여섯 주인공들의 동선과 글의 전개를 이끈다.
서사는 인물들의 대화체로 이어지지만, 일상의 대화보다는 몽상같은 인간 내면의 반영에 가깝다.
“만약에 내가, 단어가 연결된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도대체 어떤 인간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소설가 지망생은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설명하며 “단어가 나의 주위에서 연기같이 둥글게 말려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없을 때 나는 어둠 속에 있게 되고_무(無)가 되어버린다”고 말한다.
번역자인 박 교수는 “이 책이 난해한 이유는 이성이나 감성이 아닌 영혼을 담은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영혼이란 ‘허망한 인간존재를 넘어서는 이타의 경지, 영원의 세계에 닿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종교적이고 구태의연하기까지 한 이 언명을 문학의 그릇에 새롭게 담으려다 보니 숱한 실험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 ‘파도’를 읽는 것은 실존과의 힘겨운 씨름이지만, 읽고 나면 영혼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이스, 포크너, 헉슬리와 함께 100년이라는 시간의 재판을 통해 검증된 20세기 초 영국문학의 4대 거장 울프. 페미니즘 소설로 읽든 영혼의 시로 읽든, 서사의 희곡으로 읽든 그것은 독자의 자유다.
울프 문학과 사유의 정수에 다가서는 지름길을 묻자 박 교수는 먼저 해설을 읽고, 9개의 섹션 머리에 놓인 ‘간주(interlude)’를 통독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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