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민방의 드라마 골든타임인 월요일 밤 9시. 후지TV에서는 7월부터 이 시간대에 ‘도쿄만의 풍경(東京湾景)’이라는 작품이 방영되고 있다.한국에서도 방송돼 화제가 됐던 ‘고쿠센’의 여선생 나카마 유키에가 주연으로 연속극에서는 처음으로 재일한국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또 여주인공 미카의 테마를 한국 피아니스트 이루마가 작곡했고, 주제곡과 삽입곡도 ‘일기예보’와 ‘자전거 탄 풍경’이 부른다. 드라마 중반부에는 ‘겨울연가’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박용하가 출연할 예정이다.
미카는 출판사에 근무하는 재일한국인 3세. 사업가로 성공한 미카의 아버지는 한국인의 뿌리를 중시해 일본인과의 결혼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카는 일본인 창고노동자 료스케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드라마는 이들의 사랑과 결혼을 둘러싼 갈등, 그리고 재일한국인의 끈끈한 가족애를 진지하게 그린다.
불륜 이야기나 가벼운 트렌디 드라마가 주류를 이룬 일본 민방 드라마에서 정통 러브스토리를 선보인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게다가 드라마 타이틀에는 ‘동경만경’이라는 한국어 제목이 함께 등장한다. 또 일기예보가 귀에 익은 목소리로 주제곡 ‘그대만 있다면’을 들려준다. 이쯤 되면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어머니가 남긴 일기를 바탕으로 한 회상 장면에서 나카마가 1인2역을 한 미카의 어머니와 료스케의 아버지의 사랑이 등장해, 일본에서 ‘러브스토리’란 제목으로 상영된 한국영화 ‘클래식’과 비슷하다는 얘기도 들린다.
알고 보니 이 드라마의 프로듀서들이 모두 한국과 인연이 깊은 이들이다. 한 명은 MBC와 후지TV의 합작드라마 제작에 참여했는데, 당시 직접 체험한 두 나라 문화의 차이가 이번 작품을 만드는 단초가 됐다고 한다. 또 한 명은 재일한국인을 사랑한 적이 있는데, 언젠가 그 경험을 드라마로 만들고 싶었고, 지금은 바로 그 때라고 말했다.
드라마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취업 진학 결혼 등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재일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아픔을 겪었고, 지금도 국적을 숨긴 채 한국인도 일본인도 될 수 없는 정체성 혼란으로 갈등하는 이들의 사연이 올라있다.
드라마를 통해 재일한국인 문제를 알게 됐다는 일본인들의 격려와 자성의 목소리도 들린다. 한일관계나 재일한국인 문제의 역사적 배경을 직접 그리지는 않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미카가 재일 한국인임을 힘들게 고백하는 장면의 대사는 정말 현실적이다. “외출할 때는 늘 외국인등록증을 몸에 지녀야 한다” “해외에 나갈 때 녹색의 대한민국 여권에 일본재입국허가를 받지 않으면 일본으로 돌아올 수도 없다” “선거권도 없다”….
이처럼 재일한국인 문제를 일본의 시청자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낸 것은 ‘한류’의 힘이다. 여기에 한일 합작드라마의 제작경험이 더해져 아직도 그늘 속에 감춰져 있는 재일한국인의 현실이 드라마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일본에서의 한류현상 그 자체나 경제적 효과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좀 아쉽다. 한류의 성과, 그리고 한일 합작드라마의 경험을 이어갈 좀 더 깊이 있는 문화적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수영ㆍ일본 조치대학 신문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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