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을 전후한 소련 공산체제 붕괴의 역사적 변화를 막연하게나마 예측한 서방 전문가는 보수가 아닌 진보 쪽에 많았다. 돌이켜 보아도 상식과 어긋난 현상은 소련 체제의 자기변혁 가능성을 달리 인식한데서 비롯됐다.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여긴 보수세력은 위대한 개혁자 고르바초프에 놀라면서도, 그 개혁이 체제변혁과 붕괴에 이를 것은 상상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태생적 악인이 개과천선할 가능성을 부정한 탓이다. 반면 사회주의 이상을 아끼는 진보세력은 그 가능성을 읽고 믿으려 했다. 이렇게 보면, 보수세력이 소련 붕괴에 "그 것 봐라"며 환호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서론과는 동떨어진 듯 하지만, 국제 정치의 가장 거창한 드라마라는 미국 대통령 선거의 향방을 가늠하는데도 흔히 비슷한 아이러니를 만난다. 1992년 공화당 현직 대통령 조지 부시와 민주당의 클린턴이 맞붙었을 때다. 미국 정치를 미국인들보다 정확하게 읽는다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일반적 예상은 냉전 종식과 독일 통일 등의 격변을 잘 관리하고, 걸프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부시가 무난히 승리하리란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클린턴의 승리를 누구보다 일찌감치 예측한 것은 독일 디 차이트지 발행인 테오 좀머를 비롯한 진보 진영의 관찰자들이었다.
■ 미국 대선만 5차례 취재했다는 테오 좀머는 클린턴의 유세 현장을 며칠 지켜 본 뒤, "미국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며 클린턴 승리를 단언했다. 클린턴이 가는 곳마다 특히 경제와 복지 후퇴에 시달린 나이 든 여성 유권자들이 손만 잡아도 전율하듯이 눈물을 쏟는 모습에서 대세가 이미 기운 것을 느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사회 저변의 대세 변화를 이내 감지한 안목은 부시의 보수 이데올로기가 미국과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걱정하는 인식에 바탕 했을 것이다. 반면 냉전 이후 보수화 물결에 즐거워하던 미국 안팎의 보수세력은 물밑의 거센 역류를 느낄 생각조차 않은 셈이다.
■ 2000년 대선 때는 반대현상이 나타났다. 영국 가디언지의 마틴 케틀은 진보적인 블레어 총리가 민주당 고어의 승리를 과신한 것은 직관과 희망을 그대로 예측에 반영한 탓이라고 지적했다. 경제 안정과 노인 서민층의 지지 등 클린턴의 유산에 집착, 공화당 부시 진영의 보수 공세가 미국 사회를 파고드는 것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이런 실책을 만회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블레어는 부시 집권 이후 줄곧 외교적으로 휘둘리고 있다는 평가다. 그는 이번에도 미국사회 저변에 변화기류가 뚜렷하다며, 케리 승리 쪽에 무게를 두었다.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 세력은 저마다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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