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밀레니엄을 맞은 지 4년을 넘어서고 있는 세계 역사는 지난 500년간의 근대를 뛰어 넘어 소위 탈근대의 시대로 숨가쁜 전환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이런 세계사적 변화와는 거의 무관하다. 탈근대로의 세계사적 전환기에 한국은 전근대적 요소를 청산하고 근대성의 기초를 바로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근대가 확립한 최대의 정치적 결실인 대의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한국 국민들은 수십 년 동안 힘겹게 투쟁해 왔다. 4·19혁명, 광주민주항쟁, 6월 항쟁 등 피어린 투쟁을 통해 대의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워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공적 행사와 이에 대한 민주적 견제, 근대적 정당체계의 확립 등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근대성의 경제적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산업자본주의를 확립하려는 노력 역시 성공적으로 추진되었고 그 결과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주변부에서 반(半)주변부로 눈부시게 진입했다. 근대 산업사회의 핵심 요소인 계급적 구조와 조직화가 가속화하면서 산업사회의 이념적 정체성 확립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논쟁이 비로소 본격화하고 있는 것 또한 우리의 현재 모습이다. 반공 이데올로기의 절대적 헤게모니 효과가 급속히 쇠진하면서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뒤늦게 개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이념 논쟁이 반드시 시대착오적인 것은 아니다. 후쿠야마는 소위 탈냉전의 세계질서를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적 보편성이 완성된 것으로 규정한 바 있다. 월러스틴은 이에 대해 현 시대가 자유주의가 완성된 시대가 아니라 자유주의가 종식된 시대라고 반박한다. 누구 주장이 옳든 최소한 현 시대가 이데올로기 논쟁이 종료된 시대는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다.
자유주의 논쟁에 한 가지 사실을 첨언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한국의 보수 우파들은 오늘날 진보좌파들이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위협한다고 비판하지만 부끄럽게도 우리는 아직 근대적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이 땅에 구현해 본 적이 없다.
주권적 국민국가는 근대가 확립한 지배의 단위이다. 그런데 미국이 주도하는 신제국적 질서, 유럽이 추진하고 있는 초국가적 연합체의 모색, 세계화와 초국가적 행위자들의 급속한 성장 등이 개별 국민국가의 입지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세계의 모습이다.
바로 이 시점에 대한민국에서는 바야흐로 국가정체성 논쟁이 한창이다. 국가 주권의 문제, 국가 통일의 문제, 국가 이념의 문제 등 실로 다양한 영역에서 분출되고 있는 논쟁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백가쟁명의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보인다.
일제 식민시대의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고 또 한미관계를 군사·정치적으로 재정립하는 방안을 둘러싼 논란들은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의 입지와 위상을 바르게 세우기 위한 논쟁들이다. 북 핵 문제 해결과 대북 지원, 주적 문제, 국가보안법 개폐 등을 둘러싼 심각한 논쟁들은 궁극적으로 통일국가를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들일 수 있다.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며 민주화운동의 성격과 범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들, 그리고 새 민주주의에 바람직한 사회경제 질서가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분출되는 이데올로기 논쟁들은 민주 한국의 체제와 직결된 논쟁들이다.
이 모든 논쟁들을 시대착오적인 논쟁들로 치부해 버릴 수는 물론 없다. 또 이런 논쟁은 필연적으로 정파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이 논쟁들이 한국 정치, 경제, 사회의 근대적 정체성을 모색하기 위한 진통이라는 사실만은 인식해 둘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이 논쟁들이 전개되고, 또 그것을 통해 우리 체제의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이 최소한 근대적 합리성과 민주성에 기초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세계는 탈근대로 향하고 있는데 우리의 사고와 행동이 전근대적일 수는 없지 않은가.
/김수진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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