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7월28일 서울지검 이규명 검사가 서울형사지법 이범열 부장판사, 최공웅 판사, 이남영 서기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반공법 위반 사건 항소심을 맡은 이 부장판사와 최 판사가 그 달 2일부터 4일까지 증인 신문을 위해 이 서기와 함께 제주도로 출장을 다녀오면서 피고인의 변호인으로부터 항공료와 숙박비, 술값 등 97,000원 상당의 뇌물을 받은 혐의였다.3선 개헌을 통해 박정희가 세 번째 대통령직에 취임한 지 12일 만에 벌어진 이 사태는 외견상 현직 판사들의 수뢰 사건이었지만 그 속내는 정권의 사법부 길들이기였다. 일부 법령에 대한 위헌 판결과 시국 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법원의 잇따른 관용적 태도로 박정희 정권과 사법부 사이에는 그 전 몇 해 동안 긴장이 누적되고 있었다. 정권은 관행에 편승한 현직 판사들의 '명백한 범죄 행위'를 빌미로 사법부에 타격을 가하려 했고, 이를 통해 사법부의 기가 꺾이기를 바랬다.
그러나 구속 영장이 청구된 바로 그 날 서울형사지법 판사 37명이 사표를 냄으로써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사표 행렬은 전국으로 번져 며칠 사이에 무려 153명의 법관이 사표를 제출했다. '사법권 수호'를 내세운 법원과 '엄격한 법 집행'을 내세운 검찰은 구속영장의 기각, 재신청, 기각을 되풀이하며 극한으로 대립했다. 여론이 법원 편으로 돌아가자 박정희는 8월1일 법무장관 신직수에게 수사 중지를 지시했고, 검찰이 사건 관련 검사들을 인사 조치함으로써 사태가 마무리됐다. 흔히 제1차 사법파동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뒤이은 유신 시대에 정권의 완전한 시녀로 전락할 사법부가 박정희 정권의 외압에 맞서 보여준 마지막 저항의 몸부림이었다. 소장 판사들이 정권과 법원 수뇌부의 수구적 태도에 다시 맞서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의 시동이 걸린 1988년 이후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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