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차례로 익사시키기’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여자 3대가 각자의 남편을 차례로 물에 빠뜨려 죽이는, 그러면서도 매 장면마다 1부터 100까지 숫자를 등장시키는 엉뚱한 구석도 볼 수 있는 소위 ‘예술영화’였다.한국관객에게는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으로 유명한 감독의 1988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 그러나 단 한 곳의 극장(서울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에서 개봉해 3주동안 고작 3,000명이 봤다.
30일에는 이란의 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 개봉한다. 동생을 살리려는 어린 남매들의 가슴 아픈 삶을 그린 이 영화는 2000년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받은 수작.
혹독한 현실 속에서도 서로를 아껴가는 남매들의 삶이 눈물겨운 이 영화 역시 서울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단관에서 개봉한다. 개봉 전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관객의 관람 습관을 감안하면 그리 상업적으로 성공할 영화는 아니다.
보고 싶어도 보기 쉽지 않은 영화는 이 뿐만이 아니다. 8월6일 개봉하는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초기작 ‘모두 하고 있습니까’와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는 서울 코아아트홀에서만 볼 수 있다.
같은 날 개봉하는 이탈리아 가브리엘 무치노 감독의 풋풋한 사춘기 영화 ‘나에게 유일한’도 하이퍼텍 나다에서만 상영된다.
이에 비해 멀티플렉스 상영관의 스크린을 휩쓰는 영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개봉 후 열흘이 지났는데도 서울 80개를 포함해 전국 250개 스크린을 점령 중이고, 23일 개봉한 한국영화 ‘늑대의 유혹’은 전국 220개 스크린에서 관객을 만나고 있다.
물론 예술영화 전용극장이라고 해서 무조건 칭찬할 일도, 대작영화에 스크린을 서너 개씩 내준 멀티플렉스라고 해서 무조건 비난할 일도 아니다. 전용극장은 나름대로 틈새시장과 부가판권을 겨냥한 포석이고, 대규모 동시개봉은 한국영화의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몇몇 극장 덕분에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나 ‘나에게 유일한’ 같은 훈훈한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이런 작은 극장의 고집에 뜨거운 경의를, 이런 극장에게 나름의 생존방식을 부여한 한국영화 현실에 싸늘한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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