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온도를 섭씨로 나타내지만 미국에선 화씨을 쓴다. 화씨(華氏)란 수은온도계를 만든 독일 물리학자 파렌하이트(1686∼1736)를 이른다. 섭씨(攝氏)는 스웨덴 천문학자 셀시우스(1701∼1744)를 말한다.레이 브래들리의 소설 중에는 미래의 암울한 정보감시사회를 그린 '화씨 451'(책이 불 붙는 온도)이 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씨 9/11'은 이 소설 제목을 흉내낸 게 아닐까?
올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화씨 9/11'은 미국에서는 '미성년자 관람불가'이지만 국내에선 '15세 이상 관람가'다. 이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국회 의원회관 대강당에서는 무료 시사회가 열렸다. 이라크 추가 파병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주관했다지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설마 국회의원들이 '공짜' 영화를 보려고 국민의 혈세를 낭비한 건 아니겠지….
'화씨 9/11'은 미성년자에게는 지루하겠지만 그런대로 재미있는 '할리우드 영화'다. 부시에게 대통령이란 호칭을 붙인 일이 한 번도 없었으며 베스트셀러였던 '멍청한 백인들'에서는 부시를 대통령직을 도적질한 '왕도둑'으로 몬 무어의 '화씨 9/11'은 부시를 '최고의 얼간이'라고 조롱한 일종의 정치풍자물이다.
이 영화에서는 9·11 테러의 배후라는 오사마 빈 라덴 일가와 부시 일가의 사업상 밀착관계 의혹을 제기한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송유관 건설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영화를 찬평(贊評)하는 이들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 사실을 추적하는 수준을 넘어 사실 속에 담겨 있는 진실을 파헤쳤다고 한다. 정치적 이슈보다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에 접근했다고 평한다. 그러나 '마이클 무어는 뚱뚱하고 멍청한 백인'이란 책의 저자들은 다큐멘터리는커녕 모큐멘터리(mockumentary·'짜가')에도 못 미치는 크로큐멘터리(crockumentary·돌팔이)라고 혹평했다. 무어 자신은 미시간주의 플린트라는 가난한 동네 태생이라지만 사실은 데이비슨이라는 부자 동네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한다. '화씨 9/11'에도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한 내용이 수두룩하단다. 아무튼 무어는 지금 부자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다. 감독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연출한 영화의 내용을 놓고 진위 여부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경박한 짓이다. 그런데 이런 영화의 인기에 편승하여 소속 정당의 노선을 선전하려는 국회의원들은 얼마가 가벼운 존재인가.
/조영일 연세대 화학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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