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는 영웅을 만들고 영웅은 난세를 평정한다는 말이 있다. 영웅은 시대 혼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며, 어려운 시대에는 영웅이 요청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영웅이 거론되는 시대는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위기 상황이라는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영웅은 위기 상황을 지시하는 상징적 기호인 동시에, 위기와 혼란을 극복하고 싶다는 집단적 욕망의 기호인 셈이다.최근 여러 문화적 영역에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조망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2001년 이순신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가 발표되어 많은 관심을 끌었고, 최근에는 김탁환의 '불멸의 이순신'이 전면 개작돼 새롭게 선을 보였다. 김훈이 이순신의 고독하면서도 처절한 내면을 그려내었다면, 김탁환의 작품은 역사적 맥락에서 이순신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두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100부작 드라마가 8월부터 방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소설과 드라마가 인간적 고뇌와 역사적 상황을 중요하게 취급한다면, 영화와 만화에서는 이순신에 대한 파격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있어 흥미롭다. 얼마 전에 촬영을 시작한 영화 '천군'은 16세기로 시간여행을 떠난 과학자가 청년 이순신을 만나게 된다는 설정이다. 이 영화에서 청년 이순신은 무과시험에 낙방하여 인삼 밀무역이나 일삼는 한량으로 그려진다. 또한 올해 출간된 어린이 만화 중에는 위인전 바깥으로 뛰쳐나온 이순신의 모습을 제시하는 작품이 많다. 호국영웅의 이미지 대신에, 엉뚱한 일을 하는 고집 센 인물이나 요괴를 물리치는 판타지적 인물로서 이순신을 만나게 된다.
종전까지 이순신은 나라를 구한 수호신이거나 국가에 충성을 다한 국가주의의 화신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성웅(聖雄)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순신의 모습은 종교적 숭배의 차원과 국가 이데올로기의 차원 사이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여러 문화적 텍스트에서는 영웅의 탈신성화라고 할 만한 흐름이 뚜렷하다. 물론 권위의 훼손이나 목적 없는 유희에 이르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정된 이미지로부터 연역되는 이순신이 아니라, 실존적 내면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역사적 상황을 살았던 인간 이순신을 발견하고, 다양한 문화적 코드를 통해서 이순신을 바라보는 새 시선들을 마련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영웅은 국가에 의해 지정되어 배급되는 아이콘이 아니라, 대중들의 삶의 문화적 감각 속에서 생명력을 부여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순신은 탈권위주의 시대에 우리사회의 문화적 감수성이 새롭게 발견한 권위의 상징이다.
개인적 고백이지만 최근에 관련 자료를 다시 읽으며 이순신에 대한 필자의 이해가 지나치게 도덕성에 치우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백의종군의 도덕성에만 주목했을 따름이지 거북선에 내포된 창조적 합리성은 전혀 못 보고 있었다. 이순신은 불세출의 영웅이니까 거북선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왜 나는 거북선이나 학익진에서 창조성이나 합리성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도덕성과 합리성의 균형감각을 발견하면서 '정말로' 이순신을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도덕성과 결합된 합리성이야말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자, 이순신의 이름에서 권위를 느끼게 하는 원천적 근거일 것이다.
우리는 왜 이순신을 21세기의 현재로 불러들이려는 것일까. 난세를 극복할 영웅을 대망하는 심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순신은 우리 사회에서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현저하게 결여되어 있는 가치들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 거울이 아닐까 한다. 이순신의 문화적 부활이 우리의 삶과 사회에 대한 성찰의 장(場)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동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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