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중국 베이징의 꽤 알려진 일급 호텔 방에 짐을 풀다 호텔 지배인 명의로 에너지 절약에 관한 베이징시의 지침에 따라 에어컨 사용을 제한하는 데 대해 양해를 바란다는 편지를 발견하였다. 중국에서 최근 전력난으로 공장 가동도 어려우며, 일부 외자기업은 자체 발전소를 설치하기도 했다는 등의 기사를 이미 보았지만, 중국의 전력난을 체험한 느낌은 또 다른 것이었다.같은 날 중국 영자지 차이나 데일리에는 전력난이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글이 두 편이 실려 있었다. 하나는 에너지 문제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중·일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며 양국 사이에 경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였고, 다른 글에서는 중국과 일본은 대립보다는 협력을 통해 에너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석유 전량을 해외에서 수입해야 하는 우리에게 이러한 상황이 주는 함의는 분명하다. 한국도 이제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에너지 확보를 위한 경쟁 혹은 소리 없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인도에서 지금까지 유럽, 북미, 아시아에서 진행된 규모를 뛰어 넘는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앞으로 제한된 석유 자원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석유 자원을 둘러싼 경쟁에 불을 붙인 것은 중국이다. 중국은 1993년부터 석유 자급자족 국가에서 석유 수입국으로 돌아섰는데 불과 10년 만에 수입량이 10배 이상 증가한 1억 톤을 초과하고, 수입의존도는 40%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현재 중국의 석유수입량은 미국의 5분의 1, 일본의 2분의 1에 불과하지만 1인당 석유 수요 증가량은 90년대 평균 연간 전 세계 증가량에 맞먹는다는 보고도 발표된 바 있다.
문제는 앞으로가 더욱 심각하다. 산업화와 자동차, 에어컨의 보급에 따른 생활 방식의 변화로 현재 선진국의 3분의 1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중국, 인도와 같은 개발도상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빠르게 증가할 것이며 그 속도는 석유 생산 증가 속도를 훨씬 초과할 것이다. 여기에 날로 불안해지는 중동 정세 등의 정치적 변수를 고려하면 유가 급상승은 시나리오만으로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에너지, 특히 석유 문제는 이미 국제정치의 주요 이슈로 등장하였다. 올 6월 중국 칭다오에서 22개 아시아국 외무장관이 참여한 '아시아협력대화(ACD)'에서는 처음으로 "높은 에너지 효율과 재생가능한 에너지 자원 및 대체연료 촉진을 위한" 공동협력체 구성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 중, 일 삼국 사이에도 석유 공동 비축, 석유 구매 분야 협력, 송유관 및 가스관 인프라 구축 등 에너지 협력을 위한 여러 아이디어가 제출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에너지 협력과 관련한 구상들은 여전히 매우 추상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반면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원 확보는 당장의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위의 협력 방안이 에너지 확보 경쟁을 완화시키기는 역부족일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러시아의 유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각축하고 있으며, 이 경쟁에서 열세에 놓인 중국은 다시 중앙아시아 및 아프리카 산유국들과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국제 에너지 전쟁에 어떤 대응책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만약 과거의 미국의 중동 지배에 의존하는 에너지 외교나 추상적인 에너지 협력 구상에 의존하여 이 문제를 극복하려고 한다면 새로운 에너지 위기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장마 뒤에 올 더위가 우리 모두에게 에너지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남주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