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천국' 유럽에서 임금인상 없이 근로시간을 늘리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사측의 요구를 노조가 수용하는 형태로 이뤄지는 이런 변화는 전례가 없는 것이어서 유럽의 노동환경이 급변하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을 낳고 있다.프랑스의 공구 및 자동차부품 생산업체인 보쉬의 노조는 19일 현재 35시간으로 돼 있는 법적 근로시간을 추가임금 없이 36시간으로 늘리는 안을 압도적인 찬성으로 승인했다. 노조가 무임금 노동시간 연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생산공장을 체코로 이전할 것이며, 이 경우 2008년까지 300명의 정리해고가 불가피하다는 사측의 최후통첩에 굴복한 것이다.
프랑스 최대 연합노조인 노동총동맹(CGT)은 "정리해고 위협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단위노조가 상황에 맞게 대처한 것일 뿐"이라고 의미를 축소했지만, 내심 프랑스 사회보장의 핵심인 35시간 노동제가 무너지는 신호탄이 아닌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앞서 독일 지멘스 노사는 공장을 헝가리로 이전하지 않고 일자리를 보장하는 대신 일부 공장의 노동시간을 추가 임금없이 주당 35시간에서 40시간으로 늘리는 데 합의했다.
주당 평균 노동시간이 41.7시간인 스위스는 프랑스 독일의 움직임에 자극받아 상대적으로 월등히 많은 근로시간에도 불구하고 주당 42시간으로 늘리는 것을 검토중이며, 오스트리아도 대기업을 중심으로 주 40시간 근무제 복귀를 시도하고 있다.
반면 독일의 다임러―크라이슬러는 근로시간을 35시간에서 40시간으로 추가 임금지불 없이 늘리자는 사측의 요구에 반발해 노조원 6만여명이 15일부터 경고파업에 들어가는 등 홍역을 치르고 있다. 사측은 노조가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남부 진델핑엔에 있는 메르세데스 벤츠 공장을 북부 브레멘이나 남아공으로 옮길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이런 사측에 대해 야당은 물론 집권 사회민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까지 "논란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말로 사실상 근로시장 연장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여 노조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드는 상황이다.
강력한 노동운동의 전통을 갖고 있는 유럽의 노조가 무기력하게 근로시간 확대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고용사정이 워낙 안좋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경우 8%대까지 내려갔던 실업률이 다시 10%에 육박하고 있다. 반면 유럽연합(EU)의 확대로 동구권의 값싼 노동력은 넘쳐나고 있는 상황이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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