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를 보냈으면 메시지를 보내야지 이렇게 전화를 하는 법이 어딨어요?” “샌드위치가 자꾸 새느위치가 되잖아? 그리고 별표 갈매기 두 개(이모티콘 *^^*을 뜻함) 어떻게 하는 거야?”SBS ‘파리의 연인’을 보다 보면 혹시 이 드라마 엔딩이 기주(박신양)가 스트레스로 쓰러져 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체 무슨 재벌 2세가 저렇게 신경 쓸 일이 많은지. 당장 아버지는 자기 여자친구에게 협박까지 하면서 딴 여자와 정략결혼을 시키려 하고, 회사 일은 새 프로젝트 때문에 끝도 없이 바쁘다. 한가하게 놀면서 여자나 바다에 ‘버려놓고’ 오는 어느 ‘황태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다른 드라마에는 진짜 ‘미쳐서’ 자멸하는 악녀도 나오는데, 기주가 상대하는 악녀는 기주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바둑(!)을 둘만큼 머리와 끈기, 지구 끝까지라도 한 우물만 파겠다는 독기까지 가졌다.
게다가 태영(김정은)을 두고 경쟁하는 수혁(이동건)은 자신의 자식 같은 조카다. 기주가 수혁에게 말한 그대로, 그는 ‘겉보기에’ 가진 것 많은 사람일 뿐,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랑은 쉽게 가질 수 없다. ‘파리의 연인’은 재벌 2세 주변의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들며 재벌 2세를 모든 게 가능한 황태자가 아니라, 왕위 때문에 사랑도 할 수 없는 저주 받은 왕자로 만든다.
그러나 놀랍게도, 기주는 그 답답한 상황에서 태영의 세계에 들어가려 노력한다. 태영과의 만남 뒤에는 지옥같은 생활이 이어지지만, 기주는 태영에게 자기 처지를 하소연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7살 많은 아저씨’로서 ‘애기’와 일상을 함께 한다.
그는 태영의 집에 가서 촌스러운 파란색 추리닝을 입으며 태영의 일상에 적응하고, 같이 ‘하드’를 먹으며 직접적인 금전 도움 대신 함께 산 ‘핑크 돼지’ 저금통 배 채우라며 동전 한 뭉치를 주는 남자다. 그는 태영을 자기 틀에 끼우는 대신 태영을 배려하려 노력한다.
태영이 기주에게 반한 건 그의 신분이나 그가 일을 열심히 하기 때문이 아니다. 기주의 매력은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단지 사랑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배려로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어쩌면 갈수록 태영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쏟아붓는 수혁이나, 기주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만 집착하는 윤아(오주은)가 놓친 것은 바로 그런 것 아니었을까. 이모티콘이라곤 알지도 못했던 남자가 애인과 같이하기 위해 그 바쁜 일 와중에 낑낑대며 휴대폰 버튼을 누르는 모습은 그 남자의 돈 100억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다. 정말, 메시지를 보냈으면 전화가 아닌 메시지로 응답하는 사랑인 것이다.
분명히 재벌 2세와 평범한 여성의 사랑은 너무 우려먹어서 바닥이 보일 정도로 뻔한 설정이다.
그러나 ‘파리의 연인’은 그것들에 ‘진지하게’ 접근하면서 만만치 않은 현실속에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지만 따뜻한 사랑의 설레임을 극대화시켰다. 그러면서 ‘파리의 연인’은 장르의 특성상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 장르적 재미의 최대치를 뽑아낸다. 굳이 말하자면 ‘웰 메이드 트렌디 드라마’인 셈이다.
물론, 이 비현실적인 남자때문에 “저러니까 여자들 눈만 높아지지!”라고 툴툴거릴 (필자를 비롯한) 남자들의 원성은 더 커지겠지만. 현실에는 이런 남자가 없길 손 모아 기도한다. 도대체 우린 어떻게 살라고.
강명석/대중문화평론가 lennonej@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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