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사람 아니야. 당신 편안히 안 놔둘 거야, 부숴버릴 거야.”검은색 원피스에 검정 코트를 걸친 그녀가 극락강 어귀에 서서 26년 전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되새긴다.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자신도 모르게 닦아 내리고 있는 서윤희(이효춘).
배신 당한 여자, 윤희
1978년 겨울, 그녀는 동거하던 남자 강동우(이정길)에게 버림받고 그와의 사이에 난 딸 혜림마저 하늘로 떠나 보내야 했다. 극락강에서 자기 손으로 다섯살바기 딸의 뼛가루를 뿌린 그녀는 시퍼렇게 멍든 가슴을 부여잡으며 동우를 찾아가 그렇게 말했다.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고 독하게.
“혜림이는 늘 가뭄에 타는 풀 포기 같았어. 우리는 밤낮 당신한테 목 마르고 배가 고팠단 말이야. 걘 버려지고서도 버려진 줄 모르고, 절 버린 사람을 그렇게 한결같이 그리워했어.”
혜림이가 놀이터에서 놀다 미끄럼틀에서 떨어져 사고로 죽던 그날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 대신 숨을 거둔 혜림이를 부여잡고 밤이 하얗게 새도록 강동우를 기다렸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사꾼 집안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와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어머니, 지방 각지에 흩어져 사는 못난 형제들을 천형처럼 여기던 그 남자를.
일진그룹 사주의 딸 노영주(이영애)와 창사기념일 리셉션에서 만나 석달 2주간의 연애 끝에 결혼을 결심한 그. “마지막으로 부탁해 나한테 싫은 점 있으면 고칠게. 나 혼자면 이렇게까지 안 매달려. 나 싫어 간다는데 구질구질하게 안 붙잡아. 그런데 혜림이가 무슨 죄야”라며 매달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출세에 목말라 있는 청년은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던 시절 만나 5년 동안 동거하며 딸까지 낳았던 그녀를 그렇게 한 순간에 버렸다.
그리고 끝내 죽은 딸조차 가슴에 한번 품어주지 않았다. ‘하나님! 당신은 없습니다. 당신은 계시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그날 그녀는 얼마나 많이 되뇌었던가. “난 무서울 게 없어. 난 겁날 것도 조심할 것도 없어. 미친 여자 되서 옷 벗고 춤 출 수도 있어. 난 못할 짓이 없어.” “천천히 차츰차츰 조여 올 거야.”
복수하는 여자, 윤희
신을 부정하게 된 그날 이후로 그녀는 날이 시퍼렇게 선 칼처럼 마음을 날카롭게 갈았다. 배신에 대한 쓰라린 대가를 고스란히 갚아주기 위해, 지옥 같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서서히 그를 밀어 넣기 위해. 영주의 오빠 영국(박근형)이 접근해 왔을 때 밀쳐내지 않았던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분노와 복수는 그녀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한때 그녀에게도 순정한 시간은 있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이모 집에 얹혀 살며 외할머니 손에 자라났던 그녀에게 동우는 사랑이자 구원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해 용돈을 마련하고 꼬박꼬박 장학금을 타가며 대학을 다녔다.
역시 가난해 그녀와 똑 같은 삶을 살았던 강동우. 추운 겨울날 좁은 방에 앉아서 언 발을 녹여주던 그의 손길은 따뜻했고, 단 둘이 떠난 여행지 텐트 속에서 지새웠던 밤은 한없이 길었다. 같이 살 집을 마련할 돈이 없어 결혼도 하지 못한 채 동거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겨울 외투가 다 떨어지도록 지독을 떨어가며 월급을 타 적금을 부어야 했지만, 그녀는 행복했다.
“넌 날 만나서 하나도 좋은 게 없었어. 군대 갈 때 끝냈어야 했어. 혜림이도 안 낳았어야 했고”라고 후회의 말속에 한없이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았던 그 남자에게 그녀의 ‘행복’은 곧 무참히 부서졌다.
26년 후의 윤희
노을 빛으로 물든 강가를 바라보며 회한의 시간을 되돌아 보던 그녀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혜림아 네가 떠난 지 벌써 26년. 그런데 왜 엄마는 너를 위해 끝까지 복수할 수 없었던 걸까.”
훨훨 타오르던 복수심의 불길이 조금씩 사그러든 건, 미움의 농도가 점점 묽어진 건 그녀 앞에 나타난 영국이라는 남자 때문이었다. 흔들릴 수 있다는 것, 동우 말고도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도 놀랐던 그녀는 친구 앞에서 고백했다. “나 얼마나 뻔뻔스러운지 아니? 나 이런 일 저질러 놓고 행복하고 싶다고 생각해. 사랑 받고, 대접 받으면서 살아보고 싶어. 태어나자마자 금방 호적에 올릴 수 있는 아이 낳아 출퇴근 안하고 24시간 아이 보면서 그렇게 엄마 노릇도 제대로 해보고 싶어. 혜림이 보내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런 생각해 이렇게 뻔뻔해.”
결국 그녀는 영국과 결혼해 혜림이를 닮은 딸 현이를 낳았다. 드라마는 해피 엔딩으로 끝났지만 인생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무슨 운명의 유전처럼, 몇 해 전 대학에 다니던 현이는 같은 과에 학생인 진우와 동거를 하다 임신까지 했다.
현이를 낙태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대려 갔던 날, 그녀는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밤새 울어야 했다. 26년 전 생채기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사랑과 배신, 복수로 점철된 청춘의 시간들을 고스란히 복기하며 밤새 뒤척이다 남몰래 일기장에 적었다. ‘누구에게나 눈부시게 빛나는 청춘은 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그 아름다운 기억의 흔적에 지우지 못할 상흔이 짙게 드리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아니 돌이켜 보면 청춘 자체가 미스 투성이었는지 모른다. 아찔한 현기증 같고 금세 사라질 것 같은 신기루 같은 청춘은 누구도 달아 날 수 없는, 한 번은 빠질 수 밖에 없는 덫을 숨기고 있으니까.’ 지금도 수많은 청춘들이 그 덫에 걸리고 있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작가 김수현이 말하는 78년作과 99년作
“나 혼자만 망할 수 없어. 분해서. 너도 함께 망해야 돼.”
1978년 11월 3일 ‘청춘의 덫’ 20회는 윤희(이효춘)의 복수로 몰락한 동우(이정길)가 그렇게 울부짖으며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로부터 21년이 지나 SBS에서 리메이크한 ‘청춘의 덫’의 최종회는 ‘회개와 용서’를 통한 해피엔드였다.
윤희(심은하)는 전의 독기는 온데 간데 없이 “이제 그 사람, 용서하고 있어”라고 고백하고, 동우(이종원)는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난 미워할 만한 가치도 없는 놈이야”라고 회개했다.
21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국 멜로드라마의 대표작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청춘의 덫’을 두고 김수현 작가는 “복수라는 감정이 알고 보면 덧없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윤희가 동우를 향한 복수에만 매달렸다면, 그야말로 미련하고 머리 나쁘고 아둔하고 미성숙한 사람 아니겠어요?”
작가는 “윤희의 복수심은 그렇게 단세포적인 게 아니었다. 자신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결실인 혜림조차도 외면하는 동우에 대해 분노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78년 방송윤리위원회의 결정에 맞서 “ ‘청춘의 덫’의 어설프고 급작스러운 마무리를 하지 않고 그냥 20회에서 끝냈던” 그는 98년 리메이크한 ‘청춘의 덫’에 대해 “구질구질 하지 않고 기분 좋게, 깔끔하게 마무리 됐다”고 평가했다.
“처음에 SBS에서 리메이크 해보자고 할 때 ‘아 옛날 구닥다리 이야기인데 그게 되겠어요’라고 했었어요. 그런데 버림 받은 여자의 복수란 소재는 영원한 건 가봐요. 지금까지도 다 그런 드라마 아닌가요?”
/김대성기자
■그때 한국일보에는- "방송위서 비윤리성 경고"
1978년 6월 22일부터 11월 3일까지 MBC TV를 통해 방영한 ‘청춘의 덫’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소재인 혼전동거와 임신을 다뤄 사회기강을 해쳤다는 ‘윤리의 덫’에 걸려 방송윤리위원회로부터 한차례 경고, 세 차례 결방 끝에 20회 만에 조기 종영했다.
그 해 9월 17일자 한국일보는 ‘방송윤리위원회는 이 드라마가 무분별한 남녀관계를 다룸으로써 가정생활이나 혼인제도의 순결성을 해칠 우려가 많다고 경고하는 한편 내용을 바꿔줄 것을 강력하게 종용했다.
또 ‘이정길과 이효춘이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 동거, 5세 된 아이까지 두고 있다는 데다 이정길이 가난하고 불쌍한 이효춘을 버리고 사장 딸인 김영애에게 접근하는 등 배금사상을 자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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