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서울 개봉동에서 전파상을 운영하던 나는 한국일보 덕에 졸지에 유명인사가 됐다. 뭐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평범한 내가 1984년 4월15일자 한국일보 5면 전체를 가득 채웠으니 깜짝 놀랄 일이었다.당시 경제기획원 종합통계국에서 '평균한국인'의 자료를 발표했고 한국갤럽이 그 자료에 딱 맞는 사람을 찾아 나섰지만 성과가 없었다. 한국일보는 평균 한국인을 찾기 위해 '한국의 보통사람을 찾는다'는 사고를 냈다. 사고에는 신체조건, 월소득, 자녀수, 결혼시기, 주량·흡연량 등 20여개가 넘는 평균 한국인의 조건이 나열돼 있었다.
한국일보를 구독하던 나는 꼭 내 얘기를 읽는 것 같아 즉시 전화를 했다. 몇 달 지나 지금은 고인이 된 박찬식 당시 사회부 기자가 나를 직접 취재했다. '이 사람이 한국의 보통사람'이라는 기사가 내 사진과 함께 대문짝처럼 실렸다. 당시 37세의 나는 167㎝·62㎏의 체격에 월수입 36만원인 소시민이었고 28세에 결혼해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우습게도 기사가 나간 뒤 나는 이미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연일 라디오 TV의 생방송에 출연했고 각종 잡지에도 앞다퉈 소개됐다. 전철은 물론, 골목길이나 포장마차에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얼굴이 너무 알려져 제대로 내일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덕분에 몇몇 금융기관이 나에게 장기 대출을 해줘 서울 집 마련에 들인 개인 빚을 목표보다 훨씬 앞당겨 청산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박 기자를 여러 번 만났는데 그의 도움으로 당시 평균인 조건과 흡사했던 사람 13명이 모여 '한국 평균인회'를 결성했다. 나는 영구회장으로 선출됐고 집안 경조사 때면 회원들이 함께 모여 회포를 풀고 있다. 회원들 중에는 이후 음식점을 차려 떼돈을 번 이도 있고 자영업체를 차렸다가 부도로 소식이 끊긴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여전히 평범한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나는 한푼 두푼 저축한 돈과 은행대출을 합쳐 신문 게재 후 10년 뒤인 94년 개봉동 단층 집을 5층 상가로 증축했다. 전파상도 대리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TV 냉장고 등 가전제품들이 날로 커지다 보니 물건들을 옮기기가 힘들어 2000년 대리점 운영을 중단했다.
신문에 처음 게재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고향에서 무공해 농작물을 가꾸는 농부로 변신했다. 재작년부터 봄이면 혼자 안동 고향집에 내려가 가을까지 3,000여평 밭에 고구마 감자 콩 등 20여가지의 작물을 심고 있는데 그 재미가 쏠쏠하다. 아직 미혼인 아들과 딸은 서울에서 아내와 함께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올해 57세의 나이지만 요즘은 농사와 함께 컴퓨터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인터넷 카페에 가입해 운영자를 맡고 있고 지난달엔 경북 인터넷 검색대회에 나가서 입상도 했다. 감자 28박스를 캐서 가족과 친구들은 물론, 사이버공간에서 만난 지인들에게도 택배로 보내줬다. 요즘 건강을 위해 배우고 있는 댄스스포츠 차차차와 자이브도 아주 즐겁다.
창간50주년을 맞은 한국일보 역시 보통 사람들을 위한 신문으로 계속 사랑 받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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