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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사라진 어록 낄낄… 깔깔… 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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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사라진 어록 낄낄… 깔깔… 껄껄

입력
2004.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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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박정희, 정주영…이들은 파란만장한 삶에 걸맞게 인생의 부피를 통째 증언할 말과 글을 남겼다.“죽고자 하면 살 것이오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와 같은 이들의 말과 글은 어록으로 모아져, 어떤 이에게는 떠도는 삶의 지표가 됐고 또 어떤 이에게는 흔들리는 마음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됐다. ‘유자(儒者) 선승(禪僧) 지도자 등이 교시한 명언을 기록한 책’이라는 어록.

그러나 우리시대의 어록은 더 이상 권위와 무게로 도덕률을 강제하지 않는다. “대통령 노릇 못 해먹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에서부터 “애기야, 가자”란 한마디 대사로 장안의 화제가 된 SBS ‘파리의 연인’의 기주의 대사까지.

이들의 말은 이제 때로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고 때로는 평범한 일상의 발견을 통해 자연스러운 공감을 이끌어내는 친숙한 언어가 된다. 정제되지 않은 말 혹은 스스로의 무게를 벗어 던진 말의 조합, ‘21세기형 어록’들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떠돌며 우리의 일상을 파고 들고 있다.

● 21세기 원조 어록

새로운 어록의 연대기 첫 머리에는 아이돌 스타에서 로커로 변신한 문희준을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 “록 자격증이라도 따고 싶어요.” “하루에 오이 세 개만 먹어요. 록이 원래 배고픈 음악이잖아요.” “절 아티스트라고 불러주세요.” “7옥타브까지 올라가요.”…. 그의 입을 통해서 직접 나온 것도 있고 와전된 것도 있는 이 말들은 디시인사이드 등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순식간에 번져갔다.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과 세계관을 보여주는 문희준의 말은, 순식간에 ‘어록’으로 모아졌다. 그의 말은 명명백백함과 불변의 진리를 담은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모순을 통렬하게 증명해냈는데 네티즌들은 그 때문에 더 열광했다. 그리고 그 말을 사이트마다 퍼 나름으로써 문희준의 말이 빚어내는 우스꽝스러움을 만끽했다.

그의 말이, 보통 사람들과 무언가 다르고 어딘가 빼어난 점이 있을 것 같은 스타의 이미지를 무너뜨리고 그를 철이 없거나 광적인 개인으로 전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새기는 어록 대신 낄낄 거리고 때로는 풍자의 칼날을 들이대는 ‘유희의 어록’은 그렇게 탄생했다.

“대통령 자격증이라도 따고 싶어요.” “버스 30분만 승차해요. 시장이 원래 서민적 직업이잖아요.” 최근 교통 체계 개편으로 불만을 사고 있는 이명박 서울시장 버전으로 문희준 어록을 변형시킨 ‘어록 패러디’의 등장은 그런 점에서 일부 네티즌의 관심을 모았다.

● 정치인, 살아 있는 말을 토하다

“우리가 체험으로 배운 유일한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는 실력을 쌓았다’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신감.”(1966년 서울대 졸업식 치사)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하며, 승리하는 자는 중단하지 않는다.”(66년 연두교서) “정국의 안정은 경제발전의 대전제이다.”(67년 6대 대통령 취임사)

박정희 대통령의 어록집 ‘우리도 할 수 있다’에 나오는 문구들이다.

이처럼 과거 정치인의 어록은 현장에서 툭 튀어나온 일상적인 발언이 아니라, 일반인이 쉽게 정치인과 접촉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극히 통제되고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방송과 인터넷 등이 등장함에 따라 정치인의 말이 여과 없이 전달되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정치인 어록 변신의 단초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서 찾을 수 있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었다” “나는 공작정치의 노예였다” “20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과 수교를 한 것은 엄청난 의미가 있다” “나도 23일간 단식해 봤지만, 굶으면 죽는 것은 확실하다” 등의 발언은 화제를 낳았다.

정치인의 생생한 말이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면서 어록은 더 이상 권위를 만방에 떨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전복하고 해체하는 말로 유통되고 있다. “이러다 대통령 직을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든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죠” “개XX들, 절반은 잘라야 돼라고 말한다” 같은 노무현 대통령의 말은 그런 어록의 진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보기다.

● 이신영과 한기주 그리고 김제동

그렇다고 21세기형 어록이 권위를 부정하고 자기 모순을 까발리는 증언으로만 머물고 있는 건 아니다. 위대한 정치인, 철학자, 종교인 대신 TV 드라마 속 주인공이나 코미디언이 어록의 주 생산자로 뒤바뀌면서 일상의 평범한 경험을 통해 공감대를 불러 일으키는 어록이 속속 탄생하고 있다.

6월 17일 종영한 MBC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30대 노처녀 여기자 이신영(명세빈)의 극중 대사는 ‘이신영 어록’으로 불리며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내일은 해가 뜰까요? 뜰 거라 믿습니다.

그럼 천둥, 번개, 비바람 치는 오늘 밤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해가 뜬 내일 잘 달릴 수 있도록 튼튼한 운동화를 준비하고, 마실 물도 준비해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일은 반드시 해가 뜬다는 믿음. 인생이 끝났을 땐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내 인생 다시 시작하고 싶은 현장에서 이토록 몸부림치고 있는 이신영 입니다.”

SBS 인기 드라마 ‘파리의 연인’도 속속 어록을 낳고 있다. “내가 고맙다는 말이 좀 서툴러 도덕시간에 졸았거든” “연애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같이 밥 먹고 집에 데려다 주고, 큰 상처 주기 싫어 작은 상처 주려는 게 연애라면 하는 것 같다” 같은 기주(박신양) 특유의 감성적인 말이 시청자를 사로잡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개그맨 김제동은 자신의 어록을 아예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어록은 “이별이라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이별한 사람들이여 이별을 즐기자” “흐르는 강물을 잡을 수 없다면, 바다가 되어서 기다려라”처럼 말랑말랑하고 가볍지만 감동을 주는 말이 주를 이룬다.

수 없이 많은 말들이 또 수 없이 많은 미디어를 타고 흐르며 유포되는 우리 시대에 어록은 ‘불변하고 영원한 진리’를 담은 무거운 말이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순식간에 소비할 수 있는, 달콤한 언어의 초콜릿이거나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숨긴 웃음의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어록이라고 믿었던 것들에 대한 정의는 끊임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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