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1973년 '칠레의 봄'이 피노체트의 총부리에 꺾이지 않았다면, 그래서 민중연합 아옌데의 육신이 기관총에 갈가리 찢겨 암장되지 않았다면, 영혼의 동지였던 네루다(사진)도 그리 허망하게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건재했다면 12일 오늘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모든 언어권을 통틀어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했던 파블로 네루다의 만 100세 생일이다.어쩌면 그는 오늘 밤 중동의 전사들 앞에서 그의 푸른 시편들을 낭송하다 잠시 돌아와 이슬라 네그라의 어부들과 뒤섞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갔고, 칠레 정부와 그를 좋아하는 세계의 민중은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철도노동자의 아들인 시인은 한 살 무렵 칠레 최남단 테무코라는 곳으로 이주한다. '그 산림을 못 본 사람은 이 행성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을 만큼 오지였고, '과거 없는 개척지'였다. 그 고독을 잊기 위해서 였을까. '연애시가 저절로 돋아 났다'고 했던 젊은 날 그의 시는 델 듯 뜨겁고 관능적이다('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그는 20대부터 외교관으로 세계 각국의 생활을 경험하고, 세계적 문인들과 교류한다. 하지만 스페인내전(1936년)을 경험한 뒤 공산당 입당(44년)- 망명 생활(49∼53년)- 칠레 대통령 공산당 후보(69년)로 이어지는 저항전선의 선봉에 선다. 그는 서재가 아닌 거리와 전장에서 시를 썼다. 냉전 파시즘의 폭압에 대한 항거, 투쟁의 노래들에 칠레와 세계 시민들은 열광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정치적으로 칠레의 모든 작가는 좌익이다… 나는 내가 보는 가난을 외면할 수가 없다"고 했다.
70년 조국은 선거혁명을 통해 민중연합의 아옌데 정부를 출범시키고, 이듬 해 그는 남미 작가로는 세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하지만 73년 9월, 정부는 군사쿠데타에 의해 전복되고, 그 역시 12일 뒤 그 충격으로 지병이 악화해 숨진다.
칠레 정부는 지난 해 봄 네루다 탄생 100주년 행사 만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 카니발과 시 낭송회 등 각종 행사를 벌여왔다. 칠레의 350개 구마다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의 거리를 만들자는 캠페인도 활발하다. 이 날(12일)엔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이 남미 각국의 작가들과 함께 산티아고에서 시인의 고향인 남부 파랄까지 기차 여행에 나서고, 한국의 정현종(연세대 교수) 시인과 나딘 고디머, 주제 사라마구 등 65개국 100명의 문인에게 '기념 메달'을 수여한다(시상식 오후 5시 주한칠레대사관).
민음사는 이탈리아 영화 '일포스티노'의 원작으로 더 유명한, 안토니오 스카르메타가 쓴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냈다. 그의 시집은 '스무 편의…(민음사)', '실론섬 앞에서 부르는 노래(문학과지성사)', '100편의 사랑 소네트(문학동네)가 번역 출간돼 있다. 다만, 그가 숨지기 9일 전까지 써내려 간 자서전 '추억(94년·녹두)'은 상·하권 3,000질을 끝으로 인쇄를 멈춘 상태여서 헌 책방에서 아주 운이 좋아야 구할 수 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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