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요즘 왜 이렇게 행복하지 싶어요. 나이 칠십에 새 인생을 사니까. 내 속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예술가 기질, 연예인 기질 같은 뜨거운 열정이 막 뿜어나오는 것 같아.”김석곤(70ㆍ경기 의왕시) 선생은 요즘 노인복지관 교양강좌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스타강사입니다. 자그마한 체구에 수수한 옷차림은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느 노인과 다를 바 없지요. 그러나 강단에 서면 김 선생은 마치 용광로에서 막 단련되어 나온 시뻘건 칼처럼 열기를 토해냅니다.
강의 도중 눈을 지그시 감고 “가거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고 구성지게 시조를 읊조리는가 싶으면 어느새 영화 ‘폭군 연산’의 주인공이 되어 “상감, 당신의 손에 이 나라 억조창생이 달려있소…”라고 스스로를 준엄하게 꾸짖으며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배속을 든든하게 채우며 성대를 타고 올라온 굵고 힘있는 바리톤 음성은 60명 넘게 들어가는 커다란 강의실을 쩌렁쩌렁 울리고 동갑내기 할아버지들의 눈시울을 적시며 할머니들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서울 경기 마산 등 각 지역 노인복지관의 노인교양강좌 인기 초빙강사인 그에게 오빠부대도 생겼으니 이만하면 배용준 부럽지 않지요.
스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해요. 김 선생도 예외는 아닙니다. 대한체육회 조정협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퇴임, 고향인 마산에서 경남사회진흥연수원장으로 다시 5년을 일한 뒤 은퇴했어요. 그때가 62세였지요.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의욕이 넘치는 데 막상 할 일이 없어 한동안 방황했지요. 친구들하고 몰려다니며 고스톱 치고 소주나 마시고. 주식 바람이 들어서 퇴직금도 다 날려먹고…. 그러다 문득 ‘내 이렇게 살면 정말 쓸모없는 노인네 되지’라는 생각이 들더다구요.”
김 선생은 즉각 당시 거주지였던 광명시 사회복지관에 무조건 찾아가서 봉사활동을 하고싶은데 방법을 알려달라고 졸라 ‘어르신봉사지도자과정’을 수강하게 됐어요. 어느날 초빙강사로 온 서울 강서노인복지종합관 관장이 “지도자가 되실 분들이니 언제든 한번 들러달라”고 한 말이 꼭 자신을 ‘콕 찍어서’ 하는 소리같았답니다.
“그 길로 찾아갔지요. 사회진흥연수원장 이력을 대면서 ‘길을 좀 열어달라’고 부탁했어요. 첫 출강한 2001년 11월30일은 지금도 있을 수 없어요. 강단에 섰는데 뱃속에서 뜨거운 게 쑥 올라옵디다.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고 남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비로소 찾았다는 생각에 뒷목까지 후끈하더라니까.”
노래와 옛시조, 연극까지 섞어가며 하는 강의가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서점을 돌아다니고 부지런히 인터넷 검색도 하면서 옛시조를 익히고 매주 화요일엔 안양시에서 운영하는 노래교실에 가서 발성연습과 새로운 노래 익히기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연극은 청년시절부터 좋아하는 영화의 한 대목을 외우던 버릇을 여전히 간직한 채 찜질방에 있건, 혼자 산책을 하건 수시로 대사를 읊조리며 감정선을 살립니다. 생활이 곧 강의준비인 셈이지요.
“강의 하는 게 참 즐거워요. 사람들의 감정을 쫙 끌어들이고 풀어주고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노인들의 정신적 개혁이랄까, 한마디로 하면 받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주자는 것이지. 그런 걸 수긍하게 만드는 작업이니까.”
김 선생은 슬하의 2녀1남을 성공적인 사회인으로 키워냈고 교감으로 정년퇴임한 아내와 단촐한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2002년에는 개국예정이었던 노인전문방송 조은방송의 개국 방송요원선발대회에서 1등에 당선되기도 했지만 방송사 사정으로 개국이 무한정 연기되면서 아쉽게 방송인의 길을 접었지요. 그래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70세에 새로운 인생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행복하니까요.
“내가 지금 70이지만 앞으로 90까지는 강의인생을 살 계획입니다. 스피노자가 말했잖아요.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나도 그래요.”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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