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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친일규명법 '상처 씻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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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친일규명법 '상처 씻기'로

입력
2004.07.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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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회장 김희선)이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어서 관심 있는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현행 친일진상규명법은 3월 초 16대 국회에서 통과될 때 많은 사람들이 '친일파 보호법'이라고 여겼을 정도로 문제가 많다. 현행법은 친일파 연구에 진력해 온 민족문제연구소의 지적대로 문화예술인·언론인·교육자·지식인 대다수와 군 장교나 군수 등을 조사대상에서 제외하여 반민족친일행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이번 개정안을 반기는 것은 친일의 진상을 좀더 철저하게 밝힐 수 있게 해 놓았기 때문이다. 우선 조사대상을 확대한 것이 눈에 띈다. 현행법은 중좌(중령급) 이상 장교로 침략전쟁에 적극 협조한 자, 고등문관 이상, 헌병분대장 이상, 경찰 간부 등만을 조사대상으로 삼고 있다. 반면 개정안은 고등관 이상을 당연 대상으로 만들어 문관은 군수, 경찰은 경시, 군은 소위 이상을 포함시켰고, '반민족행위가 현저한' 경우에는 그 이하 직급도 대상으로 삼았다. 친일 전력을 은폐하는 일은 앞으로 상당히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개정안은 친일행위를 새롭게 정의한다. 현행법은 '친일행위'를 전국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학병·지원병·징병·징용을 선전·선동·강요한 행위로, '친일행위자'는 중앙의 문화기관, 단체에서 황민화 운동에 적극 협력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 문화, 교육, 언론 등 다른 영역의 친일행위는 다룰 수 없게 해 놓은 것이다. 다행히 개정안은 친일행위를 문화·예술·언론·교육·학술·종교 등 사회 각 부문에서 식민통치정책과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로 확대해 놓았다. 그동안 일부 언론 사주의 친일 전력 시비를 둘러싼 논란이 그치지 않았는데 드디어 진상 규명의 길이 열린 셈이다. '전국적 차원'이나 '중앙' 등의 표현을 삭제하여 지방의 친일행위자도 조사할 수 있게 했다. 모두 현행법에 비해 큰 진전이 아닐 수 없다.

진상조사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한 것도 환영할 일이다. 현행법은 조사기간을 3년으로 해 놓았고, 위원장도 비상임으로 만들어 활동을 제한하고 있으나, 개정안은 조사기간을 5년으로 늘렸고, 위원장과 상임위원 2인을 상임으로 만들어 실질적인 조사를 할 수 있게 했다.

이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을까? 17대 국회의 원 구성이 바뀌어 기대도 되지만 안심은 금물이다. 당장 사주 일가가 조사대상으로 포함될 일부 언론, 보수단체들의 반발이 눈에 선하다. 벌써 일각에서는 개정안이 친일행위를 너무 포괄적으로 정하여 "무리하게 친일행위자를 양산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국회에서도 한나라당이 조사대상 확대는 '마녀사냥'이라며 애초 제출된 법안을 '누더기'로 만든 적이 있다.

진상 규명을 내세워 무고한 사람을 친일파로 만들면 안된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개정안에는 친일행위 판정 절차를 강화하는 조치가 포함되어 있다. 심의위원회를 설치하여 심사를 거친 뒤 친일 여부를 의결하게 한 것이다. 친일과 같은 민감한 사안의 검증에 우리 사회가 좀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려는 노력이 반영된 조치임이 분명하다.

친일 문제는 사회적 '트라우마'와 같다. 트라우마는 과거에 겪은 육체적·정신적 충격이 마음의 상흔으로 남은 것인데,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치유 방법의 하나는 환자로 하여금 자신이 겪은 끔찍한 경험에 대해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과거와 '대면'하는 것, 그것이 심리적 혼란에 빠뜨리는 무의식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는 통찰이다. 한국 사회도 이제 과거사를 직시하고 진상을 규명함으로써 그간의 질곡에서 벗어나자. 17대 국회가 역사적 사명감을 느껴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것을 바란다.

/강내희 중앙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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