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쓴 편지허만하 지음
솔 발행ㆍ9,800원
병리학자인 그는 글도 ‘메스’로 쓴다. 그만큼 정치하고, 그래서 명쾌하다. 그는 메스로 토끼 배나 가르는 게 아니라, 숫제 황소를 잡는다. 그 소를 그는 연구실이 아니라 길 위에서 찾는다. 의학자의 매운 칼질로 해부하듯 추려낸 최상급 육질. ‘길 위에서 쓴 편지’는 노시인인 허만하의 네 번째 산문집이다.
2년 전 낸 산문집 ‘길과 풍경과 시’에서 그는 “길은 끊임없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고 “길 위에 있는 것이야 말로 실존의 각성”이라고 했다. 그 길에서 시를 만나고, 길의 여정이 곧 시의 여정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끊임없이 미지의 길 위에 서서 늘 새로운 감수성으로 세계와 대면하고 싶다는 그의 이번 행로는 얼마간 숨을 고르는 듯한 느낌이다.
동서를 오가며 시론(詩論)을 캐던 예전에 비해 조금은 여유롭고 편안해졌다. ‘…편지’에서는 그래서 길이며 나무, 꽃이며 숲이 들어선 자리가 사유의 자리보다 한결 넓어졌다. 즉물적 감상을 담담히 전하면서 독자와 조금 더 친해지고 싶은 것일까.
그렇다고 치열한 탐색의 고삐마저 느슨해진 것은 아니다. 시의 뿌리에 성찰이라는 보수적인 언어를 박아두고 싶다던 시인 아니던가. 후배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글에서 그는 “나그네의 목적지는 길을 걷는 과정 자체이며, 시의 길은 더더욱 그렇다”고 단언한다. 그렇게 걸어 만나는 변경(邊境)을 늘 그렇게 사랑한다는 시인. 그는 변경을 ‘꿈의 현주소’라고 했다.
책에는 사계절 숨은 길을 톺고 더듬어 만난 것들을, 그대로 시라 해도 좋을 글로 정제한 40여편이 계절별로 묶여 있다. 띄엄띄엄 보이는 사진은 목탁 대신 사진기로 불국의 염을 전해온 부산 범어사의 관조스님 작품. ‘지난 천년의 막바지에 스톤헨지의 유적처럼 발굴됐다(평론가 정과리)’는 상찬을 받은 그의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1999년)’ 가 이제는 아슴한데, 시인은 “새 시집은 일러도 내년 초나 돼야 낼 수 있겠다”고 한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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