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최규석 지음
길찾기 발행ㆍ8,800원
이 만화가 처음 잡지에 발표된 후 인터넷에서 흘러 다닐 때, 그것을 접한 네티즌의 반응은 충격 그 자체였다. 우리의 귀여운 둘리를 저렇게 망쳐놓다니 하는 반응도 더러 있었지만, 대개는 작가의 전복적인 상상력에 대한 감탄의 쇼크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작가가 그려낸 것은 ‘현실’이었다. 그러고 보면 적나라한 현실은 그 어떤 상상보다 비현실적일지도 모른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아기 공룡 둘리는 지금부터 20여년 전에 태어났다. 성년을 맞은 둘리는 부천시가 부여한 주민등록증도 받았다. 그는 천진한 동심을 한몸에 체현한 인격체로서, 막대한 저작권료를 벌어들이는 캐릭터로서 당당한 한국 시민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20년이 흐른다면, 둘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둘리는 작업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공사판에서 발을 보호하기 위한 두터운 발목단화를 신고 있다. 그는 도시노동자이다. 프레스에 손가락 한마디가 잘려나간 그의 손에는 소주병이 들려 있다.
해부용으로 팔려간 외계인 친구 도우너를 구하기 위해 둘리가 하나하나 만나는 옛 동료 또치나 마이콜들도 한결같이 삶의 때에 흠뻑 찌들어 있다. 무기력말고는 털끝 하나도 내세울 것이 없는 캐릭터들이다. 길동이는 사기를 당한 충격으로 죽고, 공갈젖꼭지를 물고 있던 귀여운 아기 희동이는 감옥을 전전하는 폭력배가 되어 있다. 정말 음울하기가 끝간 데 없는 만화이다.
오마주란 무엇인가. 그것에는 패러디와는 달리 원작에 대한 존경의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러면 작가는 둘리의 무엇에 그 숭고한 감정을 바치고 있는가. 납치당한 도우너의 복부를 타고 해부용 메스가 지나가는 자리에 아주 조금씩 핏방울이 배어 나오는 컷은 현재적 문맥에서 새삼 충격적이다.
그것을 들여다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작품은 이 괴로운 시대를 근근히 버텨가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에 대한 슬픈 오마주일지도 모른다’고.
2003년 5월 한국에서 그려진 이 만화가 2004년 6월 이라크에서 일어난 그 끔직한 사건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런 사건은 늘 일어나고 있었다. 언제나 희생자가 있었고 가해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언제나 무력한 방관자들이 있었다.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이 작품의 또 다른 진가를 깨닫게 된다.
/염종선ㆍ창비 인문사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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