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간첩 출신 비전향 장기수의 죽음에 대해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와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원회가 엇갈린 결정을 내놓아 사회적 논란이 한층 어지러워졌다. 두 위원회의 역할이 각기 다르기에 서로 다른 결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이 같은 사안에 대한 상반된 결정으로 말미암은 혼선을 그대로 안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엇갈린 결정과 찬반 여론의 괴리를 좁히는 노력이 필요하다.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퍅한 이념과 체제 논리를 앞세워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의문사위가 전향 강요에 저항하다 고문으로 숨진 이들의 죽음을 의문사로 인정한 것은 그 투쟁이 넓게 보아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 민주적 헌법 이상의 구현에 기여했다는 판단이다. 따라서 우리 체제를 침해한 간첩을 민주투사로 공인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본질을 벗어났다. 의문사위 활동목적 자체가 이들의 범죄를 재평가하는 게 아니라, 국가권력의 위법행위로 인한 죽음인지를 가려내 반민주적 과거를 청산하는 데 있다.
물론 우리 체제를 끝내 부정한 이들이 체제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일반의 인식 또는 정서와 어긋난다. 보상심의위가 반민주 악법인 전향제도 폐지를 주장했다고 해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그런 인식을 대변한 셈이다. 그러나 이 결정으로 우리 체제의 정체성이 확립된다고 여기는 것은 안이하다.
체제를 부정한 간첩도 형벌과 함께 우리 체제 안에 편입된다. 따라서 여느 범죄자와 다름없이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이를 침해했을 때는 어떤 방식으로든 피해를 구제하고 보상하는 것이 우리 체제의 민주적 이념을 구현,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이다. 형식논리에 얽매여 논란만 할 게 아니라, 사안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하고 합리적 방도를 찾는 자세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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