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온 한국사람이 민방의 심야 프로그램을 보면 깜짝 놀란다.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젊은 여성의 선정적인 포즈와 카메라 앵글, 야한 농담으로 대부분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익하면서도 재미있는 프로그램은 더더욱 눈에 띄게 마련. 그 중 하나가 후지TV의 ‘뉴 디자인 파라다이스’(목 밤 12시35분)이다.4월부터 방송된 이 프로그램은 디자인은 21세기 지구상에 남겨진 ‘최후의 자원’이며, 일상생활에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의 디자인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횡단보도, 우체통, 명함, 종이컵, 택시 표시등, 마스크 등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템을 골라 유명 디자이너에게 새 디자인을 의뢰해 소개한다. 무엇보다 각 아이템이 지금의 디자인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숨겨진 에피소드 등을 일러스트와 함께 소개하는 부분이 재미있다.
불과 30분짜리 프로그램이고 시청률도 그다지 높지 않지만, 심야에 방송하기에는 아깝다. 서구화한 사회의 구석구석 아직도 뿌리깊게 남아 있는 전통 속에서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발굴해 세계시장의 점유율을 넓혀 온 경제대국 일본의 원동력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옥에 티라고 해야 할까, 상업방송의 한계라고 할까. 방송 중 스폰서인 닛산자동차를 노골적으로 선전한다. 그것도 디자인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진행자의 진지한 멘트에 이어.
한국에서도 TV 프로그램의 간접광고가 심각하다지만, 일본 민방은 정도가 더 심하다. 이는 일본의 방송구조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과 광고수입에 의존하는 민영방송이 공존하는 것은 한국과 다르지 않지만, 방송 중 스폰서를 노골적으로 선전하거나 심지어 프로듀서가 시청률을 조작한 사건이 터질 정도로 치열한 시청률경쟁의 반대쪽에는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확고한 지위를 보장받고 있는 공영방송이 있다. 즉, NHK가 공영방송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민영방송의 상업성은 어쩔 수 없는 속성으로 용인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NHK에 대한 비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뉴스 시청률 1위는 늘 NHK일 정도로 신뢰받고 있고, 방송기술 연구에도 앞장서 하이비전(HD TV)이나 독자적인 디지털 전송방식개발이라는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그 기본 토대는 든든한 재정기반이다. 지상파방송 월 1,395엔, 위성방송 월 2,340엔인 NHK 수신료 수입은 연간 6,500억엔 가까이 되며, 이는 NHK 전체 예산의 98%를 차지한다.
일본민방과 NHK의 극단적이기까지 한 차별성을 보고 있으면, 공공성이라는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정된 재정기반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한국에서 TV 수신료를 둘러싼 논란의 해법을 찾는데, 일본의 사례가 도움이 될 듯싶다.
/정수영ㆍ일본 조치대 박사과정(신문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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