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한때 자신이 전북도지사 후보로 거론되자 한승헌(70) 전 감사원장은 주변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사요? 나는 서울 본사가 좋아요. 지사가 된다면 차라리 애국지사가 낫죠."어두웠던 시대에도 늘 해학과 재치를 잃지 않은 그가 유머수필집 '산민객담'(범우사 발행·사진)을 냈다. '산민'(山民)은 그의 아호. '객담'은 글에서 흔히 빠지기 쉬운 엄숙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썼다는 의미다.
'자서전 메모' '법창 안팎' '역사의 모퉁이' '정치판의 역설' 등 6개 분야로 나눠 쓴 짤막한 글들은 그가 살아온 역정에서 만나고 겪었던 일들을 바탕으로 한 고급 유머 같다. 건망증도 재미있는 소재이다. '물건을 어디에다 두고도 찾지 못해서 낭패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잘 두지 그랬느냐고 어머님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씀하시면, 나는 두기는 잘 두었는데, 찾지를 못해서 그래요 하고 둘러댄다.' 연세대 설립자 언더우드의 손자인 원일한 박사를 만났을 때 이름이 모두 '하나 하나 하나'이니 호를 '삼일'로 하자고 했던 일, 기부를 의미하는 영어 'donation'이 '돈내이숑'에서 유래했다는 농담으로 좌중을 즐겁게 했던 일화도 들어있다. 비판정신, 역설, 반전, 촌철살인으로 번뜩이면서도 기품과 격조가 살아있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팍팍하던 일상생활에서도 슬며시 웃음이 나오고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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